경주 김씨

로그아웃한 편집자를 위한 문서 더 알아보기

둘러보기

사용자 모임

편집 안내

도구

인쇄/내보내기

다른 프로젝트

경주 김씨(慶州 金氏)는 경상북도 경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이다. 계림 김씨(鷄林 金氏) 또는 신라 김씨(新羅 金氏)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탈해 이사금 9년(65년)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 호공(瓠公)을 보내 살펴보게 하니, 숲속 나뭇가지에 황금빛 궤가 걸려 있고 궤에서 빛이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왕이 친히 가서 궤를 열어 보니 용모가 수려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탈해왕은 이 아이를 길렀는데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金)이라 했으며, 성장하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알지(閼智)라 불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시조 김알지(金閼智)는 신화적 인물이다.

《삼국사기》〈미추왕조〉 세보(世譜)에 의하면 알지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 아도가 수류(首留), 수류가 욱보(郁甫),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味鄒)를 낳았다고 하였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 이사금이 비로소 김씨 최초 왕에 즉위하였는데, 그가 신라 13대 왕이다. 이후 56대 경순왕대까지 김씨 왕조가 계속되었다.

이후 신라계 김씨 분화는 600여 관향으로 나뉘었는데, 이중 현재 소목 관계가 뚜렷하게 현존하는 본관은 경순왕 이후 50여 개이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 조차도 자신을 신라계 김씨로 인식하였을 뿐, 본관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1] 즉,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본관(本貫)은 출신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본관 의식이 생겨나고 본관별 가계도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일부 신라계 김씨에서 본관의 뿌리를 태보공 김알지무열왕, 신무왕 등으로 삼는 경우가 있지만, 계대를 정확하게 고증할 수는 없고 이는 후대에 자신들의 본관 시조로 삼은 것일 뿐이다.[2]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사로(斯盧)· 사라(斯羅)라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삼았다가, 307년(기림왕 10)에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고려 태조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식읍으로 주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낙랑군(樂浪郡)이라 개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였으며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308년(충렬왕 10)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413년(태종 13) 경주로 개칭하고,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蔚山)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대구부 경주군(慶州郡)이 되었다가,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씨족원류》 및 《김씨 분관록》 등의 문헌에 의하면 조선조에 들어와 경주 김씨 일부 후손들이 신라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하고,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분파하였다. 이들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수십 개의 지파로 나누어졌다. 파조 이전의 상계는 각종 병란 및 외적의 침입 등으로 인해 문헌과 유적이 멸실되어 자세히 상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