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로그아웃한 편집자를 위한 문서 더 알아보기

기독교(基督敎, 영어: Christianity) 또는 그리스도교, 크리스트교예수 그리스도가르침에 바탕을 둔 아브라함계 유일신교이며, 세계 인구의 1/3이 신자인 세계 최대의 종교이다.[1]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로서 인류를 구원하려 이 세상에 온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예수의 행적은 신약성경 중에서도 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에는 많은 종파가 있는데 "정통"으로 불리는 주류 기독교회는 크게 로마 가톨릭교회개신교회들이 포함되는 서방 기독교와, 동방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들과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이 포함되는 동방 기독교로 나뉜다. 모두 구약성경신약성경을 최종권위 경전으로 삼고, 보편공의회 교리를 따르며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기준으로 삼는다. 공의회 교리에 따라서 종파마다 구원론, 교회론, 그리스도론 등과 교회 제도에 대한 해석 차이가 있다. 주류 기독교 종파들은 삼위일체 신론과 예수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나 가르침을 펼치다가 수난을 받고 십자가형을 받아 죽음으로서 인류를 죄와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여 죽음으로부터 부활했고, 후에 재림하여 하느님의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가르친다.

기독교는 기원 후 1세기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대 지방의 유대교 종파로 출발했다. 예수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단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처형된 이후 열두 제자(사도)와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시리아, 레반트, 유럽,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남캅카스, 이집트, 에티오피아로 뻗어나갔다. 머지않아 기독교의 가르침은 유대인이 아니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방인)을 끌어모았고, 그 결과 유대인의 관습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유대교의 성전이 무너진 뒤부터 기독교는 서서히 유대교와 갈라지기 시작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37년 죽기 전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내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신앙이 범죄가 되지 않도록 했고, 325년에는 초기 기독교 세력이 결집하는 계기가 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다. 380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했다.

초기에 기독교는 하나의 보편교회로서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에 관한 견해 차이 때문에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 이후 현재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이 속한 네스토리우스파가 분리되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는 오리엔트 정교회로 불리는 콥트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등이 분리되었다.[2] 1054년에는 성령론과 교황 문제 등 다양한 교회 내 갈등으로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나 동방교회서방교회가 갈라졌다. 이후 16세기 서방교회에서 종교 개혁 과정에서 신학교회론 논쟁을 거쳐, 서방교회는 기존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 개혁교회, 성공회 등의 개신교회들로 분열되고, 그 후로도 시대적 경과에 따라 침례교회, 감리교회, 재림교회, 구세군,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이 형성되어 다양한 교파들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몰몬교, 여호와의증인 등 전통적인 교리를 부정하는 신흥 교파들이 존재하나, 주류 타교파들에게는 대체로 이단 및 이교로 취급된다. 기독교는 (특히 고대 후기부터 중세까지) 서양 문명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5 ~ 17세기 대항해시대에 그리스도교는 선교를 통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기독교'의 '기독'(基督)은 그리스어 "그리스도"(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의 중국어 음역인 '기리사독'(基利斯督)의 줄임말로 '기리사독'은 현대 북경어 발음으로 '지리쓰두'이지만, 구개음화하기 전의 옛 발음은 '기리스도'에 가깝다. 청나라 때에 '기'가 '지'로 전반적으로 구개음화하는 변화가 있었는데, 만주족 발음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예. 시바 료타로(일본어: 司馬遼太郎)의 주장[3])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에서 유래하였고, 신약성경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며 예수 그리스도는 한국어로는 '예수 구세주' 또는 '예수 구원자'의 의미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에서 유래한 단어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공식 석상에서 기름을 머리에 붓는 행위는 중동지역에서 직위를 수임받을 때 널리 사용되던 방식이었다. 왕이나 제사장들이 기름 부음을 받은 이들이었다. 세상을 구원할 왕 역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로는 '예슈아 하마시아흐'이고, 그리스어 표기는 '이에수스 크리스토스'이고 한국어로는 예수 그리스도다. 히브리어는 이미 1세기경인 예수 시절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사어(死語)가 되었고,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은 아람어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리스어 '이에수스'는 히브리어 '예슈아'에 유래한 아람어 '예슈'를 그리스어식으로 표기한 이름으로 1세기 당시에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된 이름이었다.

그리스어 '이에수스 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 '예슈아 하마시아흐'를 번역한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아람어인 '예슈 므시하'의 번역이다. '크리스토스'는 므시하(메시아)에서 전래되어 그리스어로 번역한 단어이다. 예슈는 '야훼의 구원'이라는 의미가 있고 므시하는 '기름을 붓다, 바르다'의 의미가 있다. 구약 성경에서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가 세워질 때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구원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세기 당시 예수는 사어가 되었던 히브리어인 예슈아라는 이름보다는 지배층의 언어인 그리스어식 '이에수스'나 평민들의 언어인 아람어식 '예슈'로 불리었을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지칭하는 '히브리인들의 말' 또는 '유대인들의 말'은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이다.

'기독교'(그리스도교)라는 말은 대한민국에서 개신교(Protestant)만을 일컫는 말로 흔히 사용되나, '기독교'의 실제 의미는 주요 분파인 동방 정교회, 천주교회, 개신교회 등을 포함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종교단체를 두루 뜻한다.

전 세계에 기독교 인구는 약 24억 명으로 추산되며, 실질적으로 세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이다. 한국에서 또한 2015년 통계청 발표에 의거 한국 기독교 인구는 19.7%이며, 1985~2018년까지의 기독교 인구의 추이는 "비디오 - 유튜브" 와 같다.

초기 기독교예수팔레스타인지역에서 활동하였다는 때와 그의 십자가 처형 이후[주해 1]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던 1세기 무렵부터 동서교회의 분열 이전까지의 기독교를 말한다. 초기 기독교는 베드로, 파울로스와 같은 사도선지자들이 회중을 순회하고 다녔지만 특정한 조직이나, 교리, 건물 등이 없었고 따라서 일치된 신학도 없었으며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는 집단들로 나뉘어 있었다[4]는 주장이 있는 반면,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지역마다 많은 회중이 형성되었고, 사도들이 신자들에게 성경의 가르침과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을 따를 것을 교훈하였으며 배교자 혹은 부도덕한 신자에 대해서는 경고하거나 제명해야 됨을 각 회중들에 권고하고 편지한 내용 그리고 교리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회 연로자들의 회의가 소집된 일, 또한 요한에 의해 기록된 요한의 묵시록에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교리 일치 여부와 역사, 행위들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는 등 신약 성경의 정립 과정을 보면, 이미 기원 1세기에 매우 체계화된 조직과 교리가 형성되었으며 완성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초기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또한 외적으로는 로마제국 곳곳에서 유대인들의 박해와 64년부터 시작된 로마제국의 여러 박해로 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더 체계적으로 결속해지면서 3세기경에는 로마제국을 거의 다 장악하였다.

사도들이 회중을 이끌었던 시기의 교회를 초대교회(Apostolic church)라고 한다.[5]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였다.[6]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는 기독교 신자였으며[7],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꾼 꿈의 지시대로 병사의 방패에 카이 로(Simple Labarum2.svg)를 그린 후 전투에 승리하자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8]

316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그 동안 다양한 사상으로 분화되어 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예수를 반신적 존재,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로 본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형성하였다.[9]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 1세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다.[10]

325년에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부터 787년에 열린 제2차 니케아 공의회까지의 첫 일곱 공의회에서 기독교의 중요 신학적인 문제가 논의되었다.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교였는데, 이것은 4세기 이후 기독교가 교회신학적 배경과 교리, 교회 조직과 예식 등을 정비하였음을 보여준다.[11]

초기 일곱 번의 공의회 과정을 통해 보편교회주의(공교회주의)가 만들어짐에 따라 이들과는 다른 신학을 가져 이단으로 배척된 교파들은 분화되어 서로 독자적인 전파와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된 이후에도, 칼케돈 공의회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공인하자 단성설을 주창한 콥트 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보편교회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였고, 689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되자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분리되었다.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독자적인 선교를 통하여 당나라까지 기독교를 전파하여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2]

중세 초기 서유럽과 북유럽, 그리고 동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기원후 423년 성 파트리치오아일랜드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고 하며[13], 5세기 후반에는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 등의 서유럽 지역에 있었던 프랑크 왕국메로빙거 왕조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보편교회로 개종하였고[14], 잉글랜드에는 600년 경 켈트족의 기독교 전파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보편교회의 지역교회인 로마교회는 598년 아우구스티누스를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 파견하였다.[15]

820년대에서 830년대 초, 브레멘함부르크대주교였던 안스가르의 선교 사업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바이킹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16]

동유럽의 슬라브족에게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9세기 무렵이다. 보편교회의 동로마지역 교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키릴로스메토디오스 형제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대모라바 왕국 등의 동유럽 국가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이들의 선교활동은 동로마 제국 미카엘 3세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다.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선교를 위해 옛 교회 슬라브 문자를 만들어 성서의 내용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이 문자가 키릴 문자의 기원이다.[17]

보편교회 시기의 시작인 4세기, 로마제국의 천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4세기 이후 로마제국의 수도가 되고, 서로마제국이 멸망으로 자연스레 동로마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가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11세기까지 기독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로마,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의 5개 지역의 연합체였다.[18] 하지만 서로마제국 지역의 왕권 강화와 7세기 이후 동로마제국에 대한 이슬람의 침략, 로마지역 교회의 독립적 활동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중심의 연합체와 로마교회의 분열이 발생하였다. 분열의 기점으로 로마제국의 교회 중심 대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대주교(대감독)와 로마 교회 대주교 간의 상호 파문 사건이 일어났다.[19] 동서 로마 지역의 교회 대립 이후,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당시 로마교회의 제4차 십자군이 기독교 지역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략, 점령하기까지 하였다.[20] 이는 로마제국 연합교회의 네 지역 교회와 로마지역교회의 완전한 단절을 낳은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1960년대 동방 정교회가 13세기 서방교회의 십자군이 교황의 명령에 따라 침략한 사건을 용서한 발표 이후, 약 40년만인 2002년 1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십자군이 1204년 동로마제국의 수도이자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를 점령함으로써 동방정교회와의 관계를 완전 단절시킨 것을 공식 사과했다.[21]

16세기에 들어 서방교회가 지배하던 서유럽북유럽에서 서방교회 종교개혁 지지파와 반대파의 대립과 분리가 발생하였다.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 서방교회 제도권 세력은 로마 가톨릭천주교회로, '개혁 지지파'는 개신교회로 분리되어 서방교회가 여러 개의 교단으로 구성되는 교단 교회가 되었다.[22] 이로 인해 유럽 각지에 16세기에 서방교회 개혁 지지 세력인 복음 중심주의 개신교들이 형성되고, 개혁 반대 세력인 교황중심주의인 조직과 기구 중심의 천주교회와 서로 분리되어 초대 교회의 신앙전통에 따라 각 지역과 교회마다 달리했지만,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의 부정 부패에 대한 인문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의 비판을 탄압하여 자정 능력을 상당수 상실하였고, 로마 교황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각국 군주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 허나 최종적으로 가톨릭 성직자의 부패와, 성경의 해석에 대한 논란, '면벌부'(대사)의 폐단 등의 이유로 인해서이다.[주해 2] 특히 당시 가장 큰 논란을 부른 것은 교황청의 정치적 자금과 바티칸 증축을 위한 면벌부 판매 문제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죄는 고해성사로 용서가 되고, 다만 잠벌을 보속을 통하여 갚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 보속을 면제해 주는 것을 면벌(대사)이라고 하는데, 현대에는 주로 기도나 선행 등을 보속으로 한다. 그러나 당시 독일 지방에 선포되었던 면죄(대사)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지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 죄짓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둘째, 적어도 지정된 일곱 개 성당을 순례하여야 하며, 순례할 때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여 주신 주 예수의 오상(양손,양발,옆구리)을 기념하고 공경하는 뜻으로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다섯 번씩 열심으로 바치거나 또는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0)을 바쳐야 한다.

셋째, 성 베드로 성당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바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열려 있으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헌금 대신 기도와 대재로 대사를 받을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세번째 조건이다. 가난한 자는 헌금을 대신할 수단이 있다고 명시를 하였고, 교황 역시도 "헌납자는 각자의 형편에 따라 헌납 ."라고 언급했으나 대사를 악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성직자가 등장하고 곳곳에서 면벌부 전문 판매원이 출현하는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23] 이로 인해 발생한 서방교회 교황에 대한 비판은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1534년,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8세는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선포하였다.[24] 헨리 8세의 수장령은 같은 해 잉글랜드 교회 내의 주교에 대한 임명권이 국왕에게 있다고 선포한 주교서임법과 함께 교황과의 단절을 공식화한 것이었다.[25]

마르틴 루터는 천주교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사 신부였다.[26] 평소 그는 다섯 솔라에 의지하여 오직 성서와 진실한 믿음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27]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당시 로마 가톨릭의 대사 남용을 비판하였고, 이후 종교 개혁 운동을 하게 되었다.[28]

루터와는 별개로 프랑스 리용출신의 장 칼뱅은 1533년 성경의 잘못된 해석을 이유로 교황에 반하여 교황청의 서방교회를 떠나 칼뱅주의 교회의 신앙을 출발시켰다.[29] 1536년 3월 칼뱅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30] 칼뱅은 이 책에서 이중 예정설과 같은 칼뱅주의 신학을 정리하였다. 칼빈은 장로교회개혁교회의 모태가 되었으며, 영국성공회의 신학(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정립하는데 사용되었다.

로마 가톨릭은 반종교 개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스스로 자정 노력을 하는 한편, 기독교의 확산에 탄압으로 대응하였다. 종교개혁에 반발하여 가톨릭 신앙 교리의 명확한 한계를 정립하기 위한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31]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 찬성파의 협상을 거절하고, 찬성파과 반대파를 구분지어 서방교회는 통합되지 못하게 되었다.

종교개혁 찬성파와 반대파들은 격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위그노 전쟁[32], 30년 전쟁[33]과 같은 종교 전쟁을 치렀다.

대항해 시대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가 세계 각국과 무역을 하는 한편, 식민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기독교 역시 세계로 전파되었다.[34]

한편, 16세기 이후 19세기까지 개신교에는 침례교, 퀘이커, 감리교, 재림교, 성결교, 오순절교 등 다양한 새로운 교파가 세워졌다.

소련 치하에서 억압을 받았던 러시아 정교회페레스트로이카이후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았다.[3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과 로마 가톨릭교회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개혁되었다.[36]

19세기 동안 미국의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부흥운동이 있었다. 대각성운동이라고도 불리는 부흥운동은 D.L. 무디, R.A. 토레이, J.W. 체프만 등의 부흥운동가들에 의해 일어나 개신교의 여러 교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37] 이들은 초교파적 부흥운동을 바탕으로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38][주해 3]

20세기에 들어 기존의 신학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는 자유주의 신학[39], 해방 신학[40], 기독교 근본주의[41] 등의 신학들이 영향력을 키웠다.

또한 갈라진 교파간 대화와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컬 운동이 지속되고 있다.[42]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초기에 '야소교'(耶蘇敎), 곧 예수교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연암 박지원열하일기에서, 당시 청 제국에 와 있던 천주교회의 가장 큰 국제 수도회 조직 가운데 하나인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를 '야소교'로 표기한 것을 그 시초로 보고 있다.[43]

한반도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된 시기는 천주교가 당시 조선에 전파되었던 시기(1784년)로 본다. 그외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는 설로는 임진왜란 때에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들이 예수회의 전교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설과[주해 4], 경교신라에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다.[주해 5]

한국의 천주교는 이승훈북경에서 천주교회 세례를 받은 이후 자발적으로 전파되었다. 선교사나 성직자의 선교활동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례는 조선이 유일하다.

1885년 개신교회인 장로교회 선교사 언더우드감리교회 선교사 아펜젤로가 선교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에 걸쳐 침례교, 구세군, 성공회, 재림교, 정교회 등이 전래되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분파를 거듭함에 따라 전세계에 2만 개 이상의 교단이 있으며, 한국에서도 대표적 교단으로 장로교, 천주교회, 감리교 등의 여러 교단이 분포되어 있다. 교파마다 교리도 다양하지만 기독교의 공통된 가장 큰 특징은 메시아 및 속죄 사상이다.

다른 교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한 복음서 1장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선언을 통해 예수를 "말씀"(로고스)으로 표현하였는데, 이 시기 그리스 철학에서 로고스는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질서와 힘을 뜻했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서 예수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라는 그리스도론을 강조하는 경향은 기독교 초기부터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신약성경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사도 바울로의 서신서(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 역시 예수를 주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라는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천주교회 신학자 존 도미니크 크로산성공회 신학자인 마커스 보그는 바울로의 그리스도론을 로마제국 신학 즉, 로마제국의 황제를 주님, 그리스도, 사람이 되신 하느님, 하느님의 아들로 우상화함으로써 로마제국의 정치 사상과 질서를 옹호하는 다분히 현실순응적인 신학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한다.

장로교 신학자 김회권도 바울로가 자신의 복음을 하느님의 아들이 예수십자가에서 처형되었지만 부활했다는 신앙고백으로 이해한 것은, 로마제국이라는 현실권력의 무력함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파울로가 보기에 예수의 십자가에서 죽음과 부활은 갈릴래아의 예수가 로마제국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지만, 하느님은 그를 부활하게 함으로써 현실권력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보여준 것이다.[44] 이러한 기독교의 저항적인 교의는 당연히 기독교가 반국가적인 종교로 인식되어 로마제국의 탄압을 받게 하였다.[45]

초기 기독교의 분파중 에서는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에비온주의처럼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요한복음서 역시 부정하는 종파도 있었으나 절대적으로 소수에 속했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고 나서부터는 이단으로 지목되기도 하여 그나마 남아 있던 세력도 극소수로 줄어들었다.

반대로 가현설을 주장하는 그노시스파카타리파처럼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종파들도 있었다. 영지주의 및 가현설주의자들은 육체는 악하다는 이분법을 갖고 있었으므로, 예수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썼을 뿐이라는 주장으로 예수가 완전한 사람임을 부정하였다. 이에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셨음을 부정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라고 단죄했으며, 복음서 저자 루가루가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탄생이야기를 적음으로서 예수가 여자의 몸에서 잉태된 완전한 사람임을 단언한다. 초대교회 이후의 신앙고백인 칼케돈 신경, 니케아 신경, 사도신경 등에서도 예수를 완전한 인간이자 하느님으로 묘사한다.

기독교에서의 믿음(belief), 또는 신앙(faith)이란 단어의 정의에 대해서 논란이 존재한다. 계통적 서술에 의하면 믿음은 히브리서에 있는 "희망하는 것에 대한 확신, 보지 않은 것에 대한 확신"으로 본다.[46] 대부분의 기독교 이론들이 역사적으로 해당 성경적 서술을 따라왔다. 이는 다른 아브라함계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의 자비로운 의지와 인간에 대한 계획, 그리고 현실을 초월한 영역과 앞으로 다가올 세계를 관리한다는 것을 실제로 믿는 것을 포괄한다.

기독교가 다른 아브라함계 종교와 구분되는 것은 예수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그가 고난과 부활에 의해 입증된 예언된 구원자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은 예수가 그의 아버지인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부활했음을 믿는다.[47] 이는 신약성서의 믿음에도 포함되는 내용이다.

“믿음”이란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다양한 기독교 교파의 교리와 전통에 따라 다르다. 교파마다의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으로 예수가 기독교의 중심에 자리하며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예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믿음”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피스티스'(πιστις)에서 유래한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원래 그리스어의 완료시제로 동사와 명사가 혼용된 형태로 번역되는데 영문 성경에서 영문 명사로 사용된 이 단어는 그 의미가 충분히 적절하게 전달되지는 못한다. 동사형인 pi'stis은 pisteuo로, 영문 신약에서 ‘believe’(믿음)으로 종종 해석된다. 형용사형 pistos는 거의 대부분 ‘faithful’(충실한)으로 해석된다. 신약의 저자들은 Septuagint(그리스 구약)의 해석자(번역자)들을 따라 pi'stis-그룹의 단어들은 문맥이 의도하는 내용에 따라 가장 적합하게 해석되었다. 신약에서나 다른 그리스의 문헌에서도 “pi'stis(believe-믿음)”은 다양한 주체들(사람, 전통, 실행, 단체,목적, 사실이나 일)사이에서 확고함과 관련된다. 적당한 “pi'stis-believe(믿음)”에 대한 해석은 자주 두 독립체의 관계가 “pi'stis-believe(믿음)”에 의해 연결된다고 본다. “pi'stis-believe(믿음)”류의 단어들은 그러므로 신약에서 충실함, 신의, 충성심, 약속, 신뢰, 믿음, 그리고 증명 등과 관련되어 해석되었다. 신약에서 “pi'stis-believe(믿음)”의 가장 적절한 이해와 해석은 특히 “pi'stis-believe(믿음)”이 예수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사용될 때, 그 의미에서 최근 논란의 문제이기도 하다.[48]

기독교(그리스도교)의 교파 분류는 크게 동방교회서방교회 전통으로 나뉜다. 동방교회는 현재 동방 정교회가 가장 큰 교단이며 각 국가별 동방정교회가 있다. 서방교회는 16세기 분리되어 로마 가톨릭교회의 각 교파[49]개신교의 각 교파로 교파가 존재한다. '가톨릭 교회'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전승을 따라 거룩하고, 단일하고, 보편성을 지닌, 즉 공의회의 교리를 따르는 교회 전체를 의미하지만 현재에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한다.

위 교파들의 대부분이 이슬람의 진출 및 공산주의 혁명 등으로 인해 박해를 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어, 특별히 초대교회의 중심지였던 중동지역에서는 그 교세가 1500년 동안 감소하였다. 순교의 역사와 서양 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신앙의 전통이 초대교회 연구 및 영성•전례 신학계에서 재조명 받고 있다.

• 이외에도 개신교 전통에 포함되는 교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위에 제시된 교파들이 주로 교계에서 "정통" 개신교로 인정되는 교파들이다.


• 역대 공의회에서 확인된 교리들을 부정하고 지나치게 폐쇄적이거나 반대로 개방적인 구원관을 가진 교파들로, 대부분의 타교파들은 이들을 "이단" 및 "유사 기독교"로 규정한다.

각 교파들은 크고 작은 교리상의 차이점들을 보이는데, 그 정도가 심하여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되기 이전의 신앙고백들인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칼케돈 신경 등의 내용과 차이가 있는 내용을 교리에 담고 있다면, 그 교파는 기독교내의 기존 교단에서 이단으로 간주되는 견해도 존재한다.

각 교파 사이의 신자들의 실질적인 영성 및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성찬례에 대한 견해의 차이 즉, 영성체 신학의 차이에서 초래되는 것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세세한 관점의 차이에 대해서는 성찬례 항목을 참조하라.

The 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 따르면, 세계의 기독교 신자의 교파별 비율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53] 아래의 설문 작성시 응답자들이 여러 항목을 선택할 수 있었기에 총 합이 100%를 넘는다.

대한민국은 2015년 통계청 조사 결과로 약970만 명의 개신교와 390만 명의 천주교로 나뉜다.

서양에서는 기독교와 교육의 밀접한 관계가 존재하였다.

과거에는 신적 존재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과학적 사실과 결부하는 경향이 존재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과학의 발전과 함께 그 진실성의 여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지동설의 발견을 통해 가속되었다. 18세기 즈음하여 기독교의 교리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보였던 이론인 진화론이 등장하였고, 이는 본격적인 종교와 과학의 갈등이 시작된 것으로 보여졌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오해로, 진화론 자체는 기독교 교리를 비판했던 것이 아니라, 종교를 과학적 사실로 여기던 과거의 관습과 충돌한 것으로, 이를 통해 이러한 관습에서 벗어나 신학의 발전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54]

과학의 발전으로 진화가 관찰 가능한 사실로 밝혀지면서, 과학은 축자영감설에 기반한 근본주의 기독교와의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충돌은 두가지 효과를 낳았는데, 하나는 근본주의적 움직임으로서, 기독교를 과학을 비롯한 현대적 지식으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계속적인 갈등을 부추기게 되었고, 또 하나는 기독교를 원시적이고 전통적인 근본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믿음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지게 되며, 나아가 진화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신앙적 믿음을 추구할 수 있는 현대적인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55] 이를 통해 진화라는 사실을 창조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창조주의유신진화론을 비롯, 신학적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자연과학적 가치와 종교의 가치는 비교하기 어려운 기준을 지닌다. 자연과학적 가치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으로 예외를 제거하는 가치 기준이다. 종교적 가치는 의미의 가치를 다룬므로 자연과학적으로 예외인 경우도 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자연과학의 가치와 종교적 가치는 대립하는 순간이 발생한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기의 경우 자연과학적 가치관에서는 아이의 현재 상황과 미래를 예측할 때 정상적 인간 기준에서 벗어난 예외적 사례이므로 목숨을 잇도록 도울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종교에서는 아이의 생명의 의미를 두며 비록 장애를 지닌 아니라 해도 고귀한 생명을 지닌 존재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존재에 대한 기능적 가치에 자연과학의 가치 기준을 두는 반면, 존재에 대한 의미적 가치에 종교적 가치 기준을 둔다.

근대적 인권과 장애인, 아동 보호 개념은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등장하였다.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는 윤리는 자연과학과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다. 1930 ~ 1940년대 독일의 나치는 자연과학적 인간 가치를 근거로 인종개조와 인종차별, 장애인 차별을 자행하였다. 이에 독일의 개신교회 가운데 고백 교회 참여자들은 기독교적 인간 가치를 근거로 이들과 대립하였고, 결국 나치에 의해 체포되거나, 처형 당하였다. 근대에 들어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은 노예제에 대하여 유럽의 자연과학자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열등하다며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였던 반면, 유럽의 노예제 반대 기독교인들은 피조물의 평등성을 주장하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극단적 예정론을 수용하는 이들이 전염병 가운데에도 예방적 조치를 거부하는 행동을 하며 이를 저지하게 위해 자연과학적 조치를 강제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역사와 사례를 실피면, 자연과학과 종교적 가치는 대립적 가치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가치체계이다. 자연과학은 실제적 인간이 느끼고 행동하는 가치관과 윤리적 행동 양식을 담지 못한다. 종교는 수치를 바탕으로 하는 기능의 예측을 하지 못한다. 이 둘은 대립하기 보다는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상호 보완적인 관계여야 한다.

자연과학과 종교, 특히 기독교와 충돌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은 창조에 관한 주장인 창조설의 자연과학적 역사성이다. 즉 자연과학적으로 측정가능하고, 일시가 구분된다는 창조설이 충돌 대상이다. 그러나 창조설에 의미적으로 접근하는 종교적 역사성은 그 의미가 실재하며, 창조설은 모든 인간 인종과 자연 생태계의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창조설을 자연과학적 역사성을 띤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자연과학의 범주를 벗어난 종교적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이해하는 두 부류가 있다. 전자는 근대적 자연과학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하는 이들이고, 후자는 전통적 기독교의 관점을 수용하고 의미적으로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전자는 대체로 근본주의 계열의 신학을 배경으로 하며, 후자는 주류 기독교 신학을 배경으로 한다.

창조설의 역사성은 진화를 비롯한 과학적 사실과의 관계에 따라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논리는 3가지인, 충돌론, 분리론, 그리고 친구론으로 나뉜다. 충돌론은 과학과 신앙사이의 충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과학의 전반을 부정하는 것으로 창조설에 역사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부류로 근본주의 신학에 기반하고 있는 남침례교. 제칠일 안식교[56]등이 이를 지지한다. 분리론의 경우 과학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영역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진화를 포함한 대부분의 과학적 사실을 인정하나, 창조설과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NOMA를 옹호하는 과학자들과 대부분의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천주교 등의 기독교인도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친구론은, 진화를 포함한 대부분의 과학적 사실들로부터 창조의 방식을 인정하며, 과학이 밝혀낸 것으로부터 기반한 창조설이 존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많은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등의 신앙인들과 신학교, 그리고 유신진화론 및 바이오 로고스는 친화론을 지지한다.

과학학회에서는 창조설의 자연과학적 역사성과 무관한 것으로 동의하며, 이는 주류 신학 학회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대의 기독교 전파지역
  325년
  600년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의 동상
95개조 반박문
한국 천주교의 성지인 절두산.
조선 시대 천주교 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기독교 인구 비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