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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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3월 22일 (명목상 작위)

오텔 드 부르고뉴
팔레 데 뒥 드 부르고뉴

부르고뉴 공작은 지금의 부르고뉴 지방에 해당하는 부르고뉴 공국 통치자의 신분을 지칭하는 말이다. 부르고뉴 공국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서 프랑크 왕국에 할양된 이래 손 강의 동쪽 인근을 영지로 하여왔다.

부르고뉴 공작위는 880년 부르고뉴 왕국의 카롤링거 가문의 왕 루도비쿠스 3세카를로마누스 2세와 타 왕족들이 창설했다. 그들은 프랑스의 카를링거 영지 전부를 봉건화했다.

부르고뉴의 리샤르 2세 (정의공 리샤르)는 그의 영주 루도비쿠스 3세에 의해 처음에는 부르고뉴 후작, 그 후 초대 부르고뉴 공작으로 칙봉받았고 여섯 세속 귀족 중 하나가 되었다.

부르고뉴 공작은 아래 목록에 나열된 백작들의 영주이다.

처음으로 부르고뉴 공국의 후작(후일 대공)이 된 인물은 아덴가의 리처드였다. 그의 형 보소는 지방 왕국의 군주였으며 여러 지방 왕국과의 복잡한 혼인 관계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형의 뒤를 이은 리처드 역시 지방 왕국들과의 혈연에 의해 대공이 되었으며 그의 자손들은 프랑스 왕가와 여러 대에 걸친 혈연 관계를 맺었으며 프랑스 왕가의 봉신으로서 자리잡았다.

로베르 가문 참고

1004년 부르고뉴는 카페 왕가에 의해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오토 2세 빌리암은 여전히 부르고뉴 자유국의 통치자였으나 그의 후손은 이브레아 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부르고뉴 가문은 카페 왕가의 방계였으며 로베르 2세의 막내 아들인 로베르 1세가 시조이고 그들의 후손들이 포르투갈 왕국을 세운다.

Robert le Pieux (972년 3월 27일, 오를레앙 – 1031년 7월 20일, 믈룅) 59세

Henri I

(1008년 5월 4일, ? - 1060년 8월 4일, 비트리-오-로쥬) 52세

Robert Ier le Vieux
(v. 1011년, ? - 1076년 3월 21일, 플뢰리-쉬르-오슈) 65세

(v. 1056년, ? - 29 août 1093년 8월 29일, 클뤼니) 37세

(v. 1060년, ? – 1103년 3월 23일, 타르스) 43세

(v. 1085년, ? - 1143년 2월 6일, ?) 57세

(1118년, ? - 1162년 6월 27일, ?) 44세

(1148년, ? - 1192년 8월 25일, 튀르) 44세

(1166년, ? - 1218년 7월 6일, 리옹) 52세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카페-부르고뉴 가문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를 통치한 가문이다.

부르고뉴 대공의 지위는 1700년부터 1706년까지 잠시 동안 에스파냐의 펠리페 5세가 상속하였다. 그러나 같은 기간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아버지인 황태자 루이를 비롯한 여러 프랑스 왕족이 부르고뉴 대공의 지위를 사용하였다.

(1682-1712)

Louis de France

(1751-1761)

합스부르크 왕가중세에서 르네상스시기의 유럽에서 많은 지역에 영토를 지배하였다. 또한 프랑스 왕가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왕가와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477년 부르고뉴는 여전히 프랑스 왕가의 영지였으나 부귀공 마리가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함으로써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권은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귀속되었다. 부르고뉴는 여전히 프랑스의 영토로 인정되었으나 네덜란드와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다른 영지처럼 부르고뉴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실질적인 지배를 받았다. 부르고뉴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지배는 1592년 코낵 전쟁에서 프랑스가 합스부르크 왕가를 상대로 승리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부르고뉴의 십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