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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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경(영어: Sir Isaac Newton, 문화어: 아이저크 뉴톤,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1726년/1727년 3월 20일)은 잉글랜드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Principia")는 고전역학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저서에서 뉴턴은 다음 3세기 동안 우주의 과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3가지의 뉴턴 운동 법칙을 저술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증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다.

뉴턴은 또한 첫 번째 실용적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프리즘이 흰 빛을 가시 광선으로 분해시키는 스펙트럼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에 대한 이론도 발달시켰다. 또한, 그는 실험에 의거한 뉴턴의 냉각 법칙을 발명하고 음속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뉴턴 유체의 개념을 고안하였다.

수학적 업적으로 뉴턴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f에 대해 방정식 에서 미분계수접선을 반복해서 구하여 근에 근사하게끔 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했다.

갈릴레이가 자연현상이 수학적으로 잘 표현된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제목으로 그가 만든 역학을 출판하였다. 사실상 물리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로 모든 물리학 이론에서 수학적 모델링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또한 17세기에 과학적 방법이 등장하고 과학이 시작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뉴턴은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했다.

뉴턴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심 또한 깊었다. 그는 그를 오늘날까지 기억되도록 만든 자연과학보다도 성서 해석이나 오컬트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한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H. 하트(Michael H. Hart)가 저술한 "The 100"에서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2] 그는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였고 유일신인 창조주를 믿었다.

아이작 뉴턴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하였다. 아이작 뉴턴은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 성탄절에(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주 울즈소프에서 농부(yeoman)인 아이작 뉴턴 시니어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조산아였던 그는 몸집이 매우 작았다. 뉴턴이 3살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 한나 스미스가 재혼하면서 그는 외가에 맡겨지게 되었다. 뉴턴은 그의 양아버지(바나바스 스미스는 목사)[3]에게 적대감을 보였고, 이런 사실은 뉴턴이 쓴 "19살까지의 죄 목록"에도 적혀 있다. 뉴턴의 어머니는 아이를 3명 더 낳았으나 8년 후, 양아버지가 죽자 돌아왔다.

1661년 6월 뉴턴은 선생님의 제안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그 시절 대학의 가르침은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뉴턴은 이를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현대 철학자의 철학으로 바꾸고, 천문학 역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천문학자의 이론으로 대신하였다. 1665년 그는 이항정리를 일반화하였다.

1665년 영국에서는 흑사병이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어, 이 기간동안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폐교하였다. 이 시기에 뉴턴은 2년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 시기, 즉 1665~1666년에 싹튼 것으로, 유명한 사과의 일화도 이 무렵의 일이다. 2년간의 한적한 시골살이는 과학과 철학에 대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이 시기에 수학, 광학, 천문학, 물리학의 중요한 발견들을 해냈다. 그래서 뉴턴 스스로도 2년간의 휴학 기간에 대해 "발견에 있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뉴턴은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돌아와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공로로 뉴턴은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혔다. 이보다 앞선 1669년에는 뉴턴의 지도 교수였던 아이작 배로 교수의 뒤를 이어서,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된 후,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때 뉴턴이 했던 기여들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그는 새 망원경을 만들어 왕립 학회에 제출함으로써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왕립 학회는 그것에 감명받아 1672년에 뉴턴을 회원으로 선출하였다. 1672년에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 캄캄한 방 안에서 가느다란 빛줄기가 프리즘을 통과하면 빨간색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무지개 색과 똑같았다. 이렇게 갈라진 전체색의 빛을 렌즈에 통과시키면 다시 백색광으로 변했다. 뉴턴은 색은 빛의 기본 요소이며, 백색광은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이 합쳐진 결과라고 결론 내렸다. 또,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의 빛은 각각 굴절 정도가 다르며 고유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1675년 박막의 간섭 현상을 발견하였는데, 여기서도 그의 "빛의 입자설"과 네덜란드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발표한 "빛의 파동설"의 엇갈린 주장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단, 오히려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서로의 수학적인 업적들을 인정하고 존경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번외로, 뉴턴은 실험한답시고 자신의 눈을 찔렀었다 (몇달 앓긴 했으나 나아졌다).

만유인력의 구상은 오래 전부터 싹이 터 있었으나, 요하네스 케플러행성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상 물체의 운동 연구,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진동론 등을 종합·통일하기 위하여, 이론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물체 운동 및 만유인력의 기초 법칙을 2대 지주로 하는 이론 역학을 세운 것은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였으므로, 착상 이래 20년 후의 일이었다.(사람들은 흔히,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진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낸 뉴턴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는 후에 뉴턴 본인이 자신과 친분이 두터웠던 과학자 윌리엄 스터클리에게 말년에 진술한 일화이다. 이는 나중에 스터클리의 ‘아이작 뉴턴경의 삶에 대한 회고록(Memoirs of Sir Isaac Newton’s life)‘에 실려 세상에 공개되었다)[4][5]

뉴턴은 1684년 핼리 혜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와 행성 운동에 대해서 토론할 정도로 천문학에도 식견이 있었다.

1717년, 뉴턴은 에테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을 고안했다. 밀봉된 두 유리 용기에 온도계를 넣었더니. 진공 속에 넣은 온도계가 다른 온도계만큼 빠른 속도로 온도가 올라갔다. 뉴턴은 이것을 공기보다 더 적게 존재하는 미묘한 에테르를 통해 열이 전달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뉴턴은 국회의원(1689년)과 왕립 조폐국의 국장(1696년) 등의 사회 활동, 연금술사로서의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앙숙 관계였던 로버트 훅이 죽은 뒤, 뉴턴은 런던 왕립학회의 의장(1703년)에 취임하였다. 뉴턴은 앤 여왕에 의해 1705년최하위 훈작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뉴턴은 성공회신자였지만 그의 생활은 청교도적이었다.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했다. 그래서 그를 소시니안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3-5세기에 기독교가 초기시대의 신앙에서 벗어 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으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연대기를 연구하였다.[6]

뉴턴은 1727년 3월 31일 84세의 나이로 잠자던 중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흔히 시인 알렉산더 포프가 쓴 것으로 알려진,

가 뉴턴의 묘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8] 이는 웨스터민스터 묘비문에 쓰이지 않았고, 실제로 쓰인 뉴턴의 묘비문은 다음과 같다.[9]

H. S. E. ISAACUS NEWTON Eques Auratus, / Qui, animi vi prope divina, / Planetarum Motus, Figuras, / Cometarum semitas, Oceanique Aestus. Sua Mathesi facem praeferente / Primus demonstravit: / Radiorum Lucis dissimilitudines, / Colorumque inde nascentium proprietates, / Quas nemo antea vel suspicatus erat, pervestigavit. / Naturae, Antiquitatis, S. Scripturae, / Sedulus, sagax, fidus Interpres / Dei O. M. Majestatem Philosophia asseruit, / Evangelij Simplicitatem Moribus expressit. / Sibi gratulentur Mortales, / Tale tantumque exstitisse / HUMANI GENERIS DECUS. / NAT. XXV DEC. A.D. MDCXLII. OBIIT. XX. MAR. MDCCXXVI

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 된다.

이곳에 아이작 뉴턴 경이 묻혀있노니, 신과 같은 정신력으로, 그가 발견한 수학적 원리로서, 행성의 경로와 그 모습, 혜성의 궤도, 바다의 조석, 빛 광선의 차이, 그리고 어떠한 학자도 생각하지 못했던 빛의 성질을 밝혀냈노라. 또한, 자연, 고대와 성서에 관하여 세밀하고 예민히, 그리고 확실히 설명하여, 전능한 신의 존엄함을 철학으로서 증명하였다. 인류중에 가장 위대한 자가 그대들 중에 존재했다는것을 기뻐하라. 1642년 12월 25일 출생. 1726년 3월 20일 사망.[10]

적분은 고대에 무한대(無限大), 무한소(無限小), 극한(極限)을 생각하여 원의 넓이 구의 부피 등을 계산하는 구분 구적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표적으로 카르타고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이 있다. 14세기 인도 수학자의 저작에는 삼각함수의 테일러 급수가 완전한 형태로 등장하며, 함수의 미분이 등장한다.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는 무한소를 다루며 함수를 미분하여 극대와 극소를 구하는 방법을 창안하였다. 미분과 적분을 한데 묶어주는 핵심적 정리인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는 뉴턴이 활동하기 이전에 증명되지 않은 채 알려져 있었고, 아일랜드 수학자 제임스 그레고리(James Gregory, 1638–1675)가 처음 증명을 출판하였다.[11] 영국 수학자이자 뉴턴이 다니던 케임브리지 수학과 교수인 아이작 베로우(Isaac Barrow, 1630–1677)도 증명을 출판하였다.[12][13]

뉴턴은 미적분학을 더욱 발전시키고(라이프니츠와 겹치는 부분이 많고, 이는 수학사에서 심심찮게 있는 일이다.), 함수의 근을 구할 때 미분을 해서 접선을 반복해서 그어 근에 수렴하게 하는 방법인 뉴턴법 (뉴턴-랩슨법)을 만들었다.

뉴턴의 운동법칙(Newton의運動法則)은 물리학에서 물체의 운동에 관한 역학적 기본 법칙이다. 일반적으로 고전 역학의 기초인 뉴턴의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을 이르는데, 제1법칙은 관성의 법칙이고 제2법칙은 가속도의 법칙이며 제3법칙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다.[14]

뉴우턴의 과학적 발견은 정밀하며 중력의 힘을 수학적 물리량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의 시대에 그는 중력의 역제곱 법칙을 밝힌것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력의 역제곱 법칙은 두 물체 사이의 중력 인력은 힘을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으로 나눈 값에 따라 다르다. 사과가 떨어지게 하는 그 힘이 달을 계속 그 접선 방향으로부터 지구를 향해 떨어지도록 하는 것이 분명하다. 갈릴레오의 책을 읽고 자신의 실험들을 수행하면서 뉴턴은 지표면에서의 중력의 힘이 사과를 지면으로 끌어당기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기에 그의 책 1권에서, 뉴턴은 중력의 개념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떻게 달을 이용하여 중력을 연구할 수 있는지 설명했다. 만약 이 힘이 매우 작다면 달을 직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너무 세다면 달의 경로를 너무 많이 휘게 하여 달이 자신의 궤도로부터 지구로 끌려오게 될 것이다. 결국 그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중력은 물체가 무겁든, 가볍든 크든, 작든 모든 낙하 하는 물체를 똑같이 가속시키기 때문이다. 뉴턴은 수학적으로 증명된 전제들을 가지고 천체현상으로부터 물체를 태양이나 몇몇 행성으로 향하게 하는 중력을 유도해 낸다. 뉴턴은 프린키피아 3권에서 자연 철학의 두 개의 주류의 통합을 달성했다. [15]

뉴턴은 프리즘을 연구했었는데, 프리즘으로 하는 초기 실험에서 뉴턴은 다른 색들은 꺾이거나 다른 각도로 굴절된다는 "굴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리즘과 벽 사이에 바늘 구멍이 있는 다른 카드를 놓고 완전 적색 또는 청색의 광선이 분리되어 두 번째 프리즘을 통과하도록 하였다. 두 번째 프리즘은 각 색깔의 광선을 다시 굴절시켜 다른 색을 생성하지 않는다. 그는 청색 빛이 적색 빛보다 더 굴절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험은 프리즘이 색을 생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뉴턴은 "빛은 다른 굴절성의 광선들의 집합이다"라고 정리했다. 뉴턴은 새로운 빛과 색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두개 더 독창적인 실험들을 고안해냈다. 첫번째는 프리즘에 의해 생성되는 스펙트럼의 경로에 렌즈를 놓는 것이다. 렌즈를 이용해 다른 색 광선들을 합성시키면 원래의 흰색 빛으로 복원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톱니바퀴를 렌즈와 벽 사이에 놓고, 그 톱니가 렌즈로부터 나오는 다른 색 빛의 광선들이 초점에 도달하기 전에 방해하도록 했다. 결과는 벽에 있는 점은 흰 빛이 차단되면서 통과되는 다른 색 광선들에 따라서 변하였다. [17]


케임브리지 대학교 식물원에 있는 "뉴턴의 사과나무"
백색광을 분리시키는 프리즘
1672년에 만든 뉴턴의 두번째 반사망원경[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