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춘추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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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燕國)는 중국 춘추 시대주나라 제후국이자, 전국 시대전국 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주 무왕 희발(姬發)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의 동생 소강공(召康公) (奭)을 연(燕)의 제후에 봉했다. 그러나 주나라 초기 연나라의 초기 역사에 모르는 것이 많다. 하남성(河南省)지역에 연나라가 있어서, 구별하기 위해서 하남성 지역의 연나라를 남연(南燕)이라 칭하고, 소공석의 연나라를 북연(北燕)이라고 호칭하였다. 당시에는 연(燕)이 아닌 언(匽, 郾)이라는 한자로 표기하였다. 소공석의 후손들은 산동성(山東省) 지역의 제후로 봉해졌지만, 주 성왕의 치세에 현재의 북경 부근으로 옮겼다.

이 때, 현지에 있던 섬서성(陝西省) 출신의 한후(韓侯)라고 칭하던 세력이 동쪽으로 옮겨졌다. 그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한씨(韓氏)를 사용하였다. 한국의 사학자 이병도는 이 한후 세력을 한씨 조선(韓氏朝鮮)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연나라 동부에 기후(箕侯)라는 세력이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연나라의 속국이 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멸망했다. 춘추시대 이후, 연나라의 사대부층에 한씨와 기씨를 성으로 사용한 사람도 있었다.

춘추시대에 연나라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기원전 664년에 북방의 산융에게 공격받았을 때, 당시 군주였던 장공(莊公)은 이웃나라인 제나라 환공(桓公)에게 원군을 청하였고, 산융군을 격퇴했던 적이 있었다. 산융과 전쟁한 후, 장공은 환공에게 감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나라 환공의 군대를 움직이게 하였다. 그 때에 군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국경을 넘어 가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자국에서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천자(天子)인 주나라왕(周王)이 가질수 있었고,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환공에게 일부 영토를 할양하여 연나라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제 환공은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더욱 더 명성을 얻었다. 이후 조선(朝鮮)은 먼저 연나라를 공략하였고 연나라는 조선의 빈번한 칩입을 받아 영토를 잃고 약화되었다. 이후 연나라는 조선인들은 연나라내에 지내게 하였고 변방에서는 국경을 지키게 하였다.

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呼沱、易水,地方二千餘裏,帶甲數十萬,車六百乘,騎六千匹,粟支數年。南有碣石、雁門之饒,北有棗栗之利,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此所謂天府者也。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으나, 내분으로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건국 된다. 한나라도 주나라와 비슷한 방식으로 공신 혹은 황족들을 연나라의 제후로 삼아 성립하였다.

한 고조 유방(漢高祖劉邦)은 한날 한시에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향우이자 전우였던 노관(盧綰)을 장안후(長安侯), 다시 연왕(燕王)에 봉했다. 노관(盧綰)은 국경지대의 혼란이 자신의 장기집권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흉노와 연계된 반란에 연합해 반란을 진압하란 명령을 어기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반란이 진압되버리는 바람에 흉노족에 투항하여, 흉노에게 복속되어 있던 동호(東胡)의 노왕(盧王)으로 봉해지나 그 해에 동호에서 죽었다.

이 무렵, 노관의 부장인 위만도 1,000여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도망쳐 위만조선을 세운다.[2] 위만 조선이 멸망할 때 우거왕의 아들 장항한 무제에게 투항하고 기후국(幾侯國)에 봉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