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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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족이여 (1943–1992)
(세르보크로아트어: Hej, Sloveni / Хеј, Словени, Hej, Slaveni / Хеј, Слaвени
마케도니아어: Еј, Словени
슬로베니아어: Hej, Slovani)

유고슬라비아(세르보크로아트어: Jugoslavija / Југославија 유고슬라비야[*], 마케도니아어: Југославија 유고슬라비야, 슬로베니아어: Jugoslavija 유고슬라비야,[A]; '남슬라브족의 땅')는 1918년부터 1992년까지 존재했던 동남유럽중앙유럽의 옛 국가이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B],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옛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에 형성)이 세르비아 왕국에 합병되면서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성립되었으며, 주권 국가로서 남슬라브족의 최초의 연합을 구성하였다. 이 지역은 과거 몇 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였다. 페타르 1세는 첫번째 군주였다. 1922년 1월 13일 파리에서 열린 대사회담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2] 1929년 10월 3일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국명을 변경하였다.

1941년 4월 6일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침공을 받았다. 1943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민주연방 유고슬라비아를 성립하였다. 1944년 당시 망명 중이었던 페타르 2세는 이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였다. 이후 군주제는 1945년 11월에 폐지되었다. 공산정부가 수립된 1946년, 유고슬라비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으로 국명을 변경하였고, 이탈리아로부터 이스트라, 리예카, 자다르를 획득하였다. 파르티잔의 지도자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1980년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통치하였다. 1963년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변경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구성하는 6개의 구성국은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1974년 이후 세르비아에는 다른 연방 구성국과 거의 대등한 지위를 가진 코소보 사회주의 자치주보이보디나 사회주의 자치주가 있었다.[3][4] 1980년대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와 민족주의의 부상 이후, 처음에는 공화국의 국경에 따라 5개국으로 분열되어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1993년부터 2017년까지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는 구유고슬라비아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을 전쟁범죄, 집단학살, 그리고 전쟁 중 벌어진 기타 범죄로 재판하였다.

해체 이후, 세르비아 공화국몬테네그로 공화국은 축소된 연방 국가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성립했으며, 2003년부터 2006년까지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불렸다. 이 국가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법적 승계국 지위를 원했지만, 다른 이전 공화국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공유 승계[5]에 대한 비딘터 중재위원회의 의견을 수용하여, 2003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명을 변경하였다. 2006년 세르비아몬테네그로가 각각 독립국이 되면서 해체되었고, 2008년 코소보[a]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6세기남슬라브족발칸반도로 이주한 이래,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을 비롯한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한 이후로도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아 왔다.

13세기 무렵 게르만족슬라브족 간 문화의 교차점이었던 발칸반도에는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세르비아 등 작은 공국들이 형성됐으나, 역사적으로 주변국과의 이해 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기도 했다.

14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문명이 들어서자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이슬람교 등 3개 종교와 알바니아계, 그리스계, 터키계, 불가리아계, 세르비아크로아티아계 등 5개 민족, 4개의 언어, 2개의 문자권이 혼재되면서 발칸반도의 민족적, 종교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18세기 말 남슬라브족의 민족 해방 운동을 통해 그리스 왕국, 세르비아 공국, 몬테네그로 공국, 불가리아 공국 등이 단일 국가로 독립했으나, 마케도니아는 영토 확장을 위한 요충지로 잦은 침략을 받았다. 특히 1880년대부터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3국의 마케도니아 지배권 분쟁으로 인해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고, 마케도니아 영토는 그리스 왕국세르비아 왕국에 분할되었다.[6]

모든 남슬라브족을 위한 단일 국가로서의 유고슬라비아라는 개념은 17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19세기의 일리리아 운동을 통해 두각을 나타냈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은 'jug'(남쪽)와 'slaveni'(슬라브인)를 조합하여 만들어졌다. 유고슬라비아는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의 지식인과 당시 망명 중이었던 세르비아 왕립 의회, 세르비아 왕가인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합작인 코르푸 선언의 결과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18년,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세르비아 왕국이 통합하여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이 성립되었다.[7]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베르사유 국가'라고 불렸다.

1929년,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 정부는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변경하였다. 이로써 처음으로 '유고슬라비아'가 국명으로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28년 6월 20일, 세르브인 의원 푸니샤 라치치는 국가의회에서 야당인 크로아티아 농민당 의원 5명을 총으로 쏴 그자리에서 의원 2명이 사망하고, 지도자 스체판 라디치가 몇 주 후 사망하였다.[8] 1929년 1월 6일, 알렉산다르 1세는 헌법을 폐지하고, 정당을 금지하였으며 집행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국명을 유고슬라비아로 변경하였다.[9] 그는 분리주의 경향이 억제되고,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이 완화되기를 희망하였다. 1931년, 알렉산다르 1세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독재를 포기하였다.[10] 하지만, 알렉산다르 1세의 정책은 이후 파시스트 이탈리아나치 독일,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절대적 통치자가 된 소련에서 비롯된 다른 유럽 열강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 세 정권 중 어느도 알렉산다르 1세가 추구한 정책을 선호하지 않았다. 사실, 이탈리아와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체결된 국제 조약을 개정하기를 원했고, 소련은 유럽에서 지위를 되찾고 보다 적극적인 국제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알렉산다르 1세는 중앙집권형 유고슬라비아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역사적 지역을 폐지하기로 결정하였고, 지방과 바노비나에 새로운 내부 경계가 그려졌다. 바노비나는 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많은 정치인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거나 투옥되었다. 알렉산다르 1세의 독재로, 비세르브인이 통일의 개념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는 영향을 불러왔다.[11]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의 국기가 금지되었다. 또한, 공산주의 사상 또한 금지되었다.

1934년, 알렉산다르 1세는 프랑스를 공식 방문하던 도중 마르세유에서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에 의해 암살당했다. 블라도 체르노젬스키는 이반 미하일로프의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기구에서 크로아티아 파시스트 혁명 기구인 우스타샤와 협력한 숙련된 사수였다. 알렉산다르 1세의 사망 이후, 11살이었던 아들 페타르 2세와 그의 사촌인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가 이끄는 섭정평의회가 그의 뒤를 이었다.

1930년대 후반의 국제 정치 정세는 주요 인물들 간의 편협한 태도, 전체주의 정권의 공격적인 태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수립된 질서가 거점을 잃고 이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확신으로 특징지어졌다. 1939년, 파시스트 이탈리아나치 독일의 지원과 압력으로, 크로아티아의 지도자 블라드코 마체크와 그의 당은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중요한 내부 자치정부가 있는 자치구)를 성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협정은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의 일부로 남아 있기를 명시했지만, 크로아티아는 서둘러 국제 관계에서 독립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왕국 전체가 연방화될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로 인해 계획이 중단되었다.

1941년 3월 25일, 파울 왕자는 파시스트의 압력에 굴복하여, 유고슬라비아가 전쟁에서 참여하지 않기를 바라며 빈에서 삼국 조약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이는 파울의 섭정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저버렸다. 고위 군 장교들도 조약에 반대하여, 3월 27일 국왕이 돌아오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육군 장군 두샨 시모비치는 권력을 장악하여 빈 대표단을 체포하고, 폴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17살이었던 페타르 2세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하면서 섭정을 끝냈다. 이후 1941년 4월 6일, 아돌프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곧바로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전에 격퇴당했던 그리스 침공이 뒤따랐다.[12][13]

1941년 4월 6일 오전 5시 12분,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군대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였다.[14]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은 베오그라드를 비롯한 유고슬라비아의 주요 도시를 폭격하였다. 4월 17일, 독일군의 침공에 대한 11일 간의 저항을 끝내며,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지역 대표들은 베오그라드에서 독일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15] 30만 명 이상의 유고슬라비아 장교와 군인이 포로로 잡혔다.[16]

추축국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하고 분할하였다. 크로아티아 독립국1929년 성립된 파시스트 민병대인 우스타샤에 의해 통치되는 나치 독일의 위성국로 성립되었다. 하지만, 1941년까지는 활동이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독일군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슬로베니아의 일부를 점령하였고, 다른 지역은 불가리아, 헝가리, 이탈리아가 점령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권에 의해 50만여 명이 살해당했고, 25만여 명이 추방당했으며, 20만여 명은 가톨릭교로 강제로 개종당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집단학살)

애초, 유고슬라비아 저항군은 공산주의 주도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왕당파 체트니크 두 파벌로 구성되었으며, 파르티잔은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국에게만 승인을 받았다. 범유고슬라비아 성향의 파르티잔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끌었으며, 극단적 친세르비아 성향의 체트니크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가 이끌었다.

파르티잔은 점령된 서유럽중앙유럽에서 가장 큰 저항군으로 발전하게 된 게릴라전을 시작하였다. 체트니크는 처음에는 망명한 왕실 정부와 연합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내 추축국보다 파르티잔과 싸우는데 집중하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체트니크 운동은 전적으로 추축국의 보급에 의존하는 협력주의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 민병대로 변모하였다.[17] 하지만, 기동성이 뛰어난 파르티잔은 게릴라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점령군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승리는 네레트바 전투와 수체스카 전투였다.

1942년 11월 26일,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비하치에서 소집되었다. 1943년 11월 29일, 평의회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야이체에서 다시 소집되었으며, 전후 국가 조직의 기반을 마련하고 민주연방 유고슬라비아를 성립하였다. 이 날짜는 전쟁 이후 공화국의 날로서 기념되었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추축국을 1944년 세르비아에서, 1945년 유고슬라비아의 나머지 지역에서 축출할 수 있었다. 붉은 군대베오그라드 해방에 제한적인 지원을 제공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철수하였다. 1945년 5월, 파르티잔은 트리에스테와 오스트리아 남부 슈타이어마르크케른텐의 일부를 점령한 후, 과거 유고슬라비아 국경 밖에서 연합군과 만났다. 하지만, 파르티잔은 같은 해 6월 다른 연합군과의 대립을 원하지 않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한 압력으로 인해 트리에스테에서 철수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옛 정부의 패권을 부정했던 파르티잔과, 국왕에게 충성하는 망명자들을 재결합시키려는 서방의 시도는 1944년 6월 티토-슈바시치 협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고, 총리로 시작하여 독립적인 공산주의 국가를 이끌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모스크바런던의 지원을 받았고, 80만여 명의 병력으로 가장 강력한 당파 세력을 이끌었다.[18][19]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내 희생자에 대한 전후 공식 추정치는 170만 4,000명이다.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제르야비치와 보골류브 코초비치가 1980년대에 수집한 후속 데이터에 따르면, 실제 사망자 수는 100만여 명이었다.

1945년 11월 11일, 선거에서 공산주의 주도의 인민전선 만이 투표에 참여하여 354석을 모두 확보하였다. 11월 29일, 아직 망명 중이던 유고슬라비아 국왕 페타르 2세가 유고슬라비아 제헌의회에 의해 폐위되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20] 그러나, 그는 퇴위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었고, 모든 반대 요소는 제거되었다.[21]

1946년 1월 31일, 소련의 헌법을 모델로 한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의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6개의 공화국세르비아에 속해있던 자치주와 자치구가 성립되었다. 연방의 수도는 베오그라드였다. 이 정책은 공산당이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 정부, 그리고 여러 민족을 인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21] 각 공화국들은 중앙 또는 측면에 붉은 별이 있는 슬라브 삼색기 또는 붉은 기 형태의 국기를 사용하였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지역적 목표는 남쪽으로 확장하여 알바니아와 그리스 일부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1947년,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간의 협상은 블레드 협정으로 이어졌다. 이 협정은 두 공산 국가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고슬라비아가 그리스 내전에 참여하며 알바니아와 불가리아를 기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 협정에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베오그라드모스크바 사이의 단절은 이제 임박한 것이었다.[22]

유고슬라비아는 국가과 민족(소수 민족)의 문제를 모든 국가과 민족이 동일한 권리를 갖는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점령 기간 동안 독일에 협력하고 독일군에 모집되었던 유고슬라비아의 독일 소수 민족 대부분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로 추방되었다.[23]

1948년,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과 거리를 두고(코민포름, 인폼비로 참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 하에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민주집중제노동자 자주 경영분권화로 대체하도록 헌법을 대폭 개정하였다. 공산당은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전년도 회의에서는 티토주의를 채택하였다.

1947년, 유럽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은 이오시프 스탈린을 따라 마셜 플랜의 지원을 거부하였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처음에는 이를 따라 마셜 플랜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1948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다른 문제에서 단호하게 결별하여 유고슬라비아를 독립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이에 유고슬라비아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내부적으로 이견이 갈렸지만, 마침내 동의하여 1949년에 소규모로,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훨씬 큰 규모로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원조가 마셜 플랜의 일부는 아니었다.[24]

1961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동구권NATO 국가 모두를 비판하고, 인도를 비롯한 다른 국가와 함께 비동맹 운동을 시작하여, 해산될 때까지 공식 소속으로 남아있었다.

1963년 4월 7일,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은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변경하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종신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각 공화국과 자치주는 자체적인 헌법, 대법원, 의회, 대통령과 총리을 가졌다.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최상위에는 대통령, 연방총리, 연방의회가 있었다(집단 대통령직은 1980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한 뒤 구성됨). 또한,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위원회 총서기와 각 공화국과 자치주의 공산주의자 동맹 총서기가 중요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국가 내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고, 그 뒤를 각 공화국과 자치주의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공산주의자 동맹 대표가 이었다. 세르비아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비밀경찰국장을 지냈던 슬로보단 페네지치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정치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한 후, 의심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알렉산다르 란코비치 내무장관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주정치에 관한 큰 의견 충돌로 모든 직함과 권리를 잃었다. 에드바르드 카르델리나 스타네 돌란츠와 같은 정부의 몇몇 영향력 있는 장관은 총리보다도 중요하였다.

엄격하게 통제되는 시스템의 첫 균열은 베오그라드와 몇몇 대도시의 학생들이 1968년 세계적인 시위에 참여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일부 학생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학생들이 옳다"고 말하면서 시위를 점차 중단시켰다. 하지만 다음 해, 그는 대학과 공산당에서 시위자들을 해고함으로써 시위 지도자들을 처리하였다.[25]

더 심각한 불복종의 징후는 1970년과 1971년의 크로아티아의 봄이었다. 자그레브의 학생들은 더 큰 시민 자유와 크로아티아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조직하였고,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정권은 대중의 항의를 억누르고 지도자들을 투옥시켰지만, 당내의 많은 크로아티아 주요 대표들은 국가 재건을 위해 당내에서 로비하며 묵묵히 이 대의를 지지하였다. 그 결과 1974년, 새로운 헌법이 비준되어 유고슬라비아의 개별 공화국과 세르비아의 각 지방에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하였다.

1974년,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이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뿐만 아니라, 보이보디나코소보 메토히야(당시 지방의 지위였음)는 알바니아어헝가리어가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소수 언어가 되고, 자치주로 승격될 정도로 큰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몬테네그로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보크로아트어베오그라드자그레브의 기준이 아닌 현지인들의 말을 바탕으로 한 형태로 바뀌었다. 슬로베니아에서 인정된 소수 민족은 헝가리인이탈리아인이었다.

보이보디나 자치주와 코소보 메토히야 자치주는 세르비아의 일부였지만, 이들 자치주도 연방의 일부를 형성하여 중앙세르비아의 의회가 아닌 자치주를 대표하는 공동 의회를 갖는 독특한 상황을 초래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은 세르비아 지배계급이 지배하던 전후 유고슬라비아와, 파시스트 이탈리아나치 독일이 국가를 분열시키고 우스타샤라는 극단적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파벌을 지지함에 따른 전시 분할 시기의 국가라는 이중적인 배경으로 구성되었다. 소수의 극단적 보슈냐크(보스니아 무슬림) 민족주의자들은 추축국에 합류하여 세르브인을 공격하였고, 극단적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보슈냐크인크로아트인을 공격하였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전쟁 말기에 나라를 장악하고, 민족주의를 공개적으로 홍보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통치하에서 전반적으로 상대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다. 민족주의적 시위가 일어나긴 했지만, 이들은 대게 진압되었고,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유고슬라비아 관리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크로아티아의 봄' 시위는 유고슬라비아가 세르비아의 패권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하고, 세르비아의 권력 축소를 요구하는 많은 크로아트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크로아티아가 고향이었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국가의 안정을 우려하였고, 크로아트인과 세르브인 모두를 달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그는 크로아트인 시위대의 체포를 명령함과 동시에 그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였다. 1974년, 세르비아 내 알바니아인이 다수 거주하던 코소보헝가리인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던 보이보디나에 자치주가 성립되면서 세르비아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 자치주들은 공화국들과 동일한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화국과 달리 법적으로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분리될 수 없었다. 이 양보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만족시켰지만, 세르비아와 새로운 자치주인 코소보에서는 반응이 달랐다. 세르브인들은 새로운 헌법을 크로아트인과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보았다.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은 자치주의 성립이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 코소보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분리될 권리를 가진 헌법상의 공화국이 될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공산주의자 동맹 지도부, 특히 1974년 헌법이 세르비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공화국이 분리할 권리를 허용함으로써 국가의 통합을 위태롭게 한다고 분개한 세르비아의 공산주의자 동맹 간부들 사이에 긴장을 조성하였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유고슬라비아는 한국과 다른 기적의 나라들에서 보고된 범위에 근접하며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들 중 하나였다. 공장이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의사 결정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 덜 중앙집권적이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독특한 사회주의 체제가 더 강력한 성장을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장률의 절대값이 공식 통계에 나타난 것만큼 높지 않더라도,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1950년대 소득과 교육이 모두 놀라울 정도로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유럽의 성장기는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막을 내렸다.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 경제 위기가 발생하였다. 이는 수출을 통해 성장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서방 자본을 빌리는 등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참담한 실수의 산물이었다.[26] 동시에, 서구 경제는 경기 침체에 빠져들었고 유고슬라비아 수입품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여 막대한 부채 문제가 발생하였다.

1989년 공식 출처에 따르면, 248개의 기업이 파산하거나 청산되었으며, 89,400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다. IMF 프로그램이 채택된 직후인 1990년의 첫 9개월 동안, 525,000명의 노동자를 포함한 또 다른 889개의 기업들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즉, 2년도 채 되지 않아 (금융 운영법에 따른) '트리거 메커니즘'이 전체 산업 인력 270만 명 중 60만 명 이상의 노동자를 해고하게 만들었다. 1990년 초 몇 달 동안, 기업들이 파산을 피하기 위해 추가로 노동력의 20%, 약 50만 명이 임금을 받지 못하였다. 파산한 기업과 해고자들이 가장 많이 집중된 곳은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코소보였다. 실질 소득은 폭락하고 사회 프로그램은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적 절망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80년대공산주의의 붕괴로 공산주의 정권이 차례로 붕괴하자 유고슬라비아는 해체 수순을 밟았다. 1987년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구성국이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가 차례로 분리 독립하며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치른 후 1992년 연방에 남은 세르비아(코소보보이보디나 포함)와 몬테네그로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결성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에 대한 연표는 다음과 같다.

유고슬라비아 전쟁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휩쓸면서, 상대적으로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세르비아 공화국몬테네그로 공화국1992년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형성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유일한 법적 승계국이 되고자 하였으나, 다른 구 공화국들은 반대하였다. 또한, 유엔에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사라졌고,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은 신생국임을 확인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77호[27]가 통과되면서 이는 인정되지 않았다. 2000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10년 간의 통치 기간과 유고슬라비아 전쟁 동안에 저지른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결국 2000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축출된 이후,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은 단독 승계를 포기하고 바딘터 중재워원회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며, 2000년 11월 1일 유엔 회원 자격을 다시 부여받았다.[5] 1992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은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라고 불렀는데,[28] 이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국가승계에 대한 주장을 불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29]

2001년 4월, 당시 현존하던 5개의 후계국은 승계 문제에 대한 협정 초안을 작성했고, 2001년 6월 협정에 서명했다.[30][31]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찍으며, 2003년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연합으로 국명을 변경하였다. 2001년 6월 29일 에서 체결된 승계 협정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모든 자산은 5개의 승계국에게로 분할되었다.[31]

2006년 5월, 몬테네그로 독립 국민투표가 통과되면서, 2006년 6월 몬테네그로는 독립국이 되었으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해체되었다. 몬테네그로의 독립 이후, 세르비아세르비아 몬테네그로법적 승계국이 되었으며 몬테네그로는 국제 기구의 회원 자격을 다시 신청하였다. 2008년 2월,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코소보가 법적으로 인정된 국가인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코소보는 유엔 회원국은 아니지만, 미국유럽 연합 회원국 등 97개국이 코소보를 주권국으로 인정했다.

세르보크로아트어는 다른 언어가 지배적인 곳에(북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국어가 제정되어, 여러 문학적, 구어적 변형이 있는 언어학적으로 단일 언어이다. 이제는 몬테네그로어,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에 별도의 사회언어적 표준이 존재한다.

유고슬라비아라는 공동 국가의 시대와 그 긍정적인 속성을 기억하는 것을 유고노스탤지어(Yugo-nostalgia)라고 한다. 스스로를 유고슬라브인이라고 자처하는 유고슬라비아 출신 주민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들은 오늘날 독립국민족과 관련된 인구 통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바노비나 (1929년–1939년). 1939년 이후, 사바 바노비나와 연안 바노비나는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로 병합되었다.
"파시즘에 죽음을, 인민에게 자유를!"을 외치는 파르티잔 스체판 필리포비치의 처형 직전
1992년 초, 해체 당시의 유고슬라비아
2008년, 구유고슬라비아의 영토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