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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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교육 과학 문화 기구(프랑스어: Organisation des Nations unies pour l'éducation, la science et la culture, 영어: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는 유네스코(UNESCO)로도 더 널리 알려져 있는 1945년 창설된 유엔의 전문 기구이다.

기구의 목적은 유엔 헌장에서 선언된 기본적 자유인권 그리고 의 지배, 더욱 보편적인 정의의 구현을 위하여 국가 간의 교육, 과학, 그리고 문화 교류를 통한 국제 사회의 협력을 촉진함으로써 평화안전에 기여하는 데 있다. 유네스코 본부는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다.[1]

유네스코와 그 권한은 1921년 9월 21일 국제적인 지적 연맹체에 관련한 국제 연맹의 결의안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여러 연구 목적에 대한 위원회를 선출하기로 했다.[2] 지식인협조국제위원회(The International Committee on Intellectual Co-operation, CICI)는 1922년 1월 4일 공식적으로 출범해 자격을 갖춘 개인이 선출돼 자문의 역할을 기본으로 하는 기관이 설립됐다. 이후에 국제지식협조연구위원회(The International Institute for Intellectual Cooperation , IICI)가 1925년 8월 9일 파리에서 창립되어 CICI의 상위 기관으로 일하기 시작했다.[3] 1925년 12월 18일 국제교육국(International Bureau of Education. IBE)이 국제 교육의 발전을 위한 목적으로 비정부기구로서 출범하기에 이른다.[4] 그러나 여러 초창기의 기구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진행과 함께 상당 부분 한계를 겪었다.

대서양 헌장연합국 선언에 조인한 후 각국의 교육부 장관들이 모인 심포지움이 런던에서 열려 1942년 11월 16일~1945년 12월 5일까지 정기적인 회담을 가졌다. 1943년 10월 30일 교육을 주제로 혹은 여러 부분으로 다루는 국제기구에 대한 필요성이 모스크바 선언에서 공표되며 중국, 영국, 미국, 소련의 동의를 얻게 된다. 유엔의 설립에 대한 예비 회의로 볼 수 있는 덤버턴오크스 회의에서도 이 내용에 대한 제안이 결의된다.

영국 런던에서 열렸던 교육부 장관들의 회의와 1943년 4월부터 6월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 기구에 관련한 유엔 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 UNCIO)가 같은 맥락으로 열려 문화/교육 기구(ECO/CONF)가 1945년 11월 1일부터 11월 16일까지 열렸다. 44개의 정부체가 대표를 파견했다. 유네스코 헌장이 37개국의 조인 하에 도입되고 예비 위원회가 설립됐다.[5] 예비 위원회는 1945년 11월 16일부터 1946년 11월 4일, 즉 유네스코 헌장이 20번째 회원국에 의해 승인을 받은 날까지 활동했다.[6]

1945년 11월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주체로 런던에서 열린 유네스코창설준비위원회에서 44개국 정부대표에 의해 유네스코헌장이 채택되었으며, 1946년 11월 20개 서명국가들이 헌장비준서를 영국 정부에 기탁함으로써 최초의 국제연합전문기구로 발족했다.

제1차 정기 총회는 1946년 11월 19일부터 12월 10일까지 열려 초대 총장인 줄리언 헉슬리를 선출한다.[7] 유네스코 헌장은 1954년 11월 정기 총회 때 개정됐다. 그 내용은 상임이사회 회원들이 당 국가들의 대표자로서 해당 국적을 갖고 있어야 하며 다만 이전과는 다르게 개인적 혹은 특정 국가에 국한되어 활동하지 않도록 함이다.[8] 이 변화는 유네스코를 그 전임이던 CICI와 구별되게 하는 특징을 구현했다. 다시 말해 회원국들이 기구에 관련된 각 분야에서 강점을 발현해 합력해야 일하게 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유네스코의 헌장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회원국들은 그 목표와 의무에 대해 인지하게 됐으며 특별히 정치적, 역사적 요인이 특별히 식민국가들의 독립과 냉전 시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기간동안 기구의 운영에 구심점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는 인종 차별주의에 대한 활동으로 레비스트라우스나 다른 인류학자들이 1950년 참여한 인류학자 선언을 시작으로 차별주의에 대한 영향력을 발한 것이다.[9] 이는 1978년 인종과 인종에 대한 차별 선언에서 이에 대한 선언을 마무리 짓는다.[10] 195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유네스코의 인종 관련 문제에 대한 처신이 국가적 분열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탈퇴한다.[11]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94년 넬슨 만델라의 지도력 하에 다시 합류하기에 이른다.

기구의 초기 활동 중 교육에 관련한 활동으로는 1947년 아이티, 마비아 계곡(Marbial Valley)에서 시작한 조종사 프로젝트를 포함했다.[12] 이 프로젝트는 전문가의 활동으로 탄력을 받아 1940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실행됐다.[13] 1948년 유네스코는 회원국이 무상 교육 및 의무교육을 보편타당하게 정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14] 1990년 모든 사람을 위한 세계 회의(the World Conference on Education for All)가 태국 좀티안에서 열려 모든 아이들과 청년 및 성인을 위한 기본 교육을 제공하고자 하는 전지구적 움직임에 동참한다.[15] 10년 후 2000년 세계교육포럼이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서 열려 회원국들이 모두를 위한 기본 교육을 2015년 경까지 추진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을 결의했다.[16]

문화에 관련한 초기 활동으로는 1960년부터 실행된 누비아 운동(Nubia Campaign)이 대표적이다.[17] 운동의 목적은 아스완 댐의 건설에 따라 아부 심벨 신전이 잠길 위험에 처하자 사원을 이전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20년 동안의 운동 전개 속에 22개의 기념비와 고건축 단지들이 재위치됐다. 최초이자 가장 큰 연계 운동으로서 모헨조다로(파키스탄), 페스(모로코), 카트만두(네팔), 보로부두르(인도네시아), 아크로폴리스(그리스) 등을 포함하여 전 방위로 전개됐다. 유네스코의 활동에 대하여 “세계문화자연유산보호에 관한 협정”(the 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이 1972년 도입됐다.[18] 이에 따라 1976년 유네스코 하의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 WHC)가 설립되고 처음으로 1978년부터 세계유산 목록을 발표하기 시작한다.[19] 이후로 문화 유산과 문화적 다양성에 관련한 법적 의제를 의결하기 위해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Convention for the Safeguarding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을 2003년에,[20] “유네스코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 협약”(Convention on the Protection and Promotion of the Diversity of Cultural Expressions)을 2005년에 공표한다.[21]

1951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의 정부간 회의는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European Council for Nuclear Research)를 설립하기로 한다.[22] 1989년 월드 와이드 웹이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에서 탄생한다.

1948~1966년까지 진행된 아리드 존 프로그래밍이 자연 과학 분야에서 추진된 중점 프로젝트이다.[23] 1968년 유네스코는 처음으로 전부간 회의를 열어 환경과 개발을 조율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에 관련한 화합을 꾀하고자 한다. 1968년 회의의 성과는 유네스코의 세계생물보호권 보호구(Man and the Biosphere Programme)를 새로 고안하는 성과를 낸다.[24]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는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이 시초부터 유네스코의 우선 목표였다. 2차 세계 대전 직후의 몇 년 간 세계 각처의 대중 소통에 대한 수요 파악과 재정비에 그 역량을 집중했다. 이에 따라 1950년대에는 기자들을 위한 훈련 및 교육 활동을 시작했다.[25] 1970년대의 신세계 정보통신 질서(New World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Order)에 대한 후속조치로 유네스코는 “통신 문제 연구를 위한 국제 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for the Study of Communication Problems, 별칭: 맥브라이드 위원회)를 설립한다.[26] 신세계정보통신질서란 선진 국가들의 헤게모니가 정보에 대한 통제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 신흥 국가들이 대항해야 한다는 반발 원리이다.[27] 커뮤니케이션문제 연구를 위한 국제위원회는 아일랜드 출신의 숀 맥브라이드가 발표한 보고서로 인해 노벨 평화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면서 그 별칭이 맥브라이드 위원회가 됐으며 이후로 유네스코는 “모두를 위한 정보 사회”(Information Society for All) 제도를 도입한다.[28][29] 프로그램은 세계 정보사회 정상회의(World Summit on the Information Society)에도 적용돼 2003년 제네바와 2005년 튀니스 회의 때에도 채택됐다.

활동의 중점 추진 목표는 다음과 같다.[30]

활동목표에 따른 분야별 활동으로는 교육분야, 과학분야, 문화분야, 라디오·텔레비전·영화의 개발 보급, 출판기술의 향상, 우주통신의 개발과 평화적 이용,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교육의 보급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이 목표에 따라 문해율을 향상시키거나, 의무 교육의 보급을 위한 활동, 그리고 세계 유산의 등록과 보호, 문화 다양성 협약의 채택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기록 유산을 보전하는 세계의 기억 사업 등을 실시한다. 그 외, 극도의 빈곤 근절, 보편적인 초등교육 달성, 초등 중등 교육에서의 남녀 차별 해소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새천년 개발 목표 등 국제 개발 목표 달성을 목표로 한다.

유네스코 활동의 보급 및 이해 증진을 위해 세계의 유명 인사를 "유네스코 친선 대사"로 임명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유네스코의 임무는 평화 구축에 기여하는 것, 빈곤의 근절, 지속 가능한 개발과 교육을 통한 상호 대화, 과학 문화,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따라서 유네스코는 《아프리카》와 《양성 평등》이라는 두 가지 범세계적인 우선 순위에 집중하고 있다.[30]

2019년 1월 기준으로 유네스코는 193개 회원국, 준회원 11개 지역을 두고 있다.[31] 리히텐슈타인은 현재 유네스코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국내 위원회를 두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유네스코의 방만한 재정을 비롯한 관리 운영 문제, 정치적 편향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제기되었다. 특히 미국, 영국은 공산권, 제3세계 국가들이 유네스코를 정치 기구로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음보우 사무총장이 제창한 "신세계 정보통신 질서"를 통한 미디어의 민주화, 정보에 대한 평등한 접근, 기자 인증 제도 도입이 언론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미국이 1984년 12월에, 영국이 1985년 12월에 유네스코를 탈퇴하면서 유네스코는 위기를 맞게 된다. 마요르 사무총장이 유네스코의 정치적 편향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한 데 이어 마쓰우라 사무총장이 근본적인 관리 운영에 대해 전반적인 개혁을 하면서 영국은 1997년 7월에, 미국은 2003년 10월에 유네스코에 복귀했다.

유네스코는 2011년 11월에 팔레스타인을 회원국으로 승인한 이후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한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미국, 이스라엘과의 갈등을 빚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늘어나는 유네스코 분담금 체납, 유네스코의 근본적인 조직 개혁의 필요성, 유네스코의 계속되는 반(反)이스라엘 편향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2017년 12월에 유네스코를 탈퇴했고 이스라엘도 미국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유네스코를 탈퇴하게 된다.

괄호 안에 표기된 날짜는 유네스코에 가입한 날짜를 의미한다.

다음 11개 지역은 유네스코 준회원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괄호 안에 표기된 날짜는 유네스코 준회원 지위를 부여받은 날짜를 의미한다.

유네스코에는 2개의 상주 옵서버, 10개의 국제 기구가 상주 옵서버 대표부를 두고 있다.

유네스코는 322개의 국제 시민 단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32]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은 "실효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Operational) 지위이며 극히 일부만이 "형식적"인 관계이다.[33] 여기서 실효적인 관계, 즉 운영되고 있는(Operational) 관계는 해당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단체를 말하는 것으로 특별한 전문적 지식과 해당 수요처를 연계하는 능력을 갖춘 단체를 일컫는다. NGO의 입장에서 유네스코와 오퍼레이셔널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사무총장의 결정 하에 어느 때라도 가능하다. 형식적(Formal) 관계는 기구와의 협력에 있어서 여러 관련 기구의 상하와 관계 없이 협력하고자 하는 시민단체와 맺게 된다. 형식적 관계라는 것은 활동분야에서 전문 지식을 갖추고 광범위하게 활동하는 국제적 단체들에게만 부여되는 지위이며 국제 사회의 요구에 부합할 만큼의 체계와 다국적 회원 등을 포함하는 단체를 칭한다. 형식적 관계는 "자문 관계"와 "동료" 관계로 나뉘며 시민단체 자체의 성격에 따라서 분류된다. 교육과학문화기구의 이사회는 사무총장의 권고에 따라 형식적 관계의 두 부류에 맞게 각 시민단체의 요구에 따라 성격을 구분 짓는다. 형식적 관계의 지위는 6년 단위로 갱신 가능하다.

유네스코와의 관계를 규명할 때 최상의 지위는 "형식적 동반자"(formal associate) 관계로서 22개 시민단체가 포함된다.[34] 이들 단체는 유네스코 본부에 사무처를 갖고 있으며 ASC로 칭한다.

대한민국1950년 2월 11일 UN특사 장면(張勉)이 대한민국을 대표해 유네스코 가입을 신청[35], 가입이 허락되었다.[35] 1950년 6월 14일에는 한국이 유네스코 회원국 가입이 확정된 직후 한국위원회 설치를 추진하였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바로 성사되지 못했다. 한국정부는 전란 중에서도 국내 유네스코 활동전개를 위한 한국위원회 설치를 추진하였다.

1952년 11월 10일 열린 제2대 대한민국 국회 제17차 본회의에 유네스코 헌장 준수서약이 상정되고, 같은 날 표결 결과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이후 국내 교육, 과학, 문화계 등 각 분과 인사들이 모여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설치 준비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설치준비대책위는 설치법 초안을 작성하고 국회의 검토 후 대통령 이승만에게 직접 올려져 1953년 7월 6일 대통령령 제801호로 <한국유네스코위원 회설치령>이 공포되었다.

1953년 7월 6일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 문교부 장관 김법린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정대위를 초대 사무총장에 임명하였으며, 1954년 1월 30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공식 창립기념총회를 개최했다.

유네스코는 2005년부터 전자도서관(World Digital Library, WDL) 작업을 시작하여, 2009년 4월 21일 인터넷에 공개하였다. 이 웹사이트에서는 각 나라의 문화 자료를 지역별, 테마별, 연대별로 찾아볼 수 있다. 일반 이용자, 연구자와 같은 직위의 구별 없이 무료로 볼 수 있다.

전시 자료는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일본 국회도서관 등 세계 32개 기관이 참여하고, 지금은 책, 위치 지도, 사진, 동영상 등 약 1,200점의 콘텐츠가 확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