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대장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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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1259년 7월 22일(음력 6월 28일)[1][2]~1297년 6월 11일(음력 5월 21일)[3])는 고려 충렬왕의 제1비이다. 고려의 첫 원나라 출신 왕비로, 세조 쿠빌라이의 공주이다. 장목왕후(莊穆王后)라고도 한다.

고려가 원나라의 신하국을 자처하면서 처음으로 혼인관계를 맺은 왕비로, 1259년 음력 6월 28일 원 세조(쿠빌라이)와 아속진가돈(阿速眞可敦)의 딸로 태어났다. 성은 보르지긴(孛儿支斤, 패아지근) 또는 기악온(奇渥溫)[4], 이름은 쿠틀룩 켈미쉬(忽都魯揭里迷失, 홀도로게리미실, 또는 홀독겁미사[주 1])이다. 제국대장공주 이후로 고려의 왕은 원나라 황족 또는 귀족 가문과 혼인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황제의 직계로 고려에 시집을 온 경우는 그녀가 유일하다(계국대장공주의 경우 추존황제의 직계이므로 실제로 황제 자리에 앉았던 황제의 직계로서 시집온 건 제국대장공주가 유일하다.).[5].

제국대장공주의 아버지 쿠빌라이는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로, 칭기즈칸의 4남 툴루이의 넷째 아들이다. 몽고 제국의 이름을 대원제국(大元帝國)으로 고치고 도읍을 베이징으로 옮겼으며, 고려와 일본, 동남아시아 등을 정복하기도 한 황제이다[6]. 그러나 제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의 대카툰, 제2, 제3, 제4오르도의 소생이 아닌 기타 후궁의 소생이었다.

16세 때인 1274년(원종 15년) 음력 5월 11일 원나라에 입조해있던 39세의 세자 심(諶, 충렬왕)과 혼인하였으며[7], 그 해 음력 6월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원래 충렬왕은 1260년(원종 원년) 이미 신종의 증손녀인 왕씨(정화궁주)와 결혼하고 왕씨는 이미 태자비로 책봉된 상태였으나[8], 왕씨보다 14년이나 늦게 혼인한 제국대장공주가 상국인 원나라의 공주라는 이유로 제1비의 위치를 차지하고 왕씨는 후궁으로 물러나야 했다. 공주는 이 해 음력 10월 고려에 들어왔는데, 충렬왕은 원나라식으로 변발을 하지 않은 신료들을 꾸짖기까지 하였다[9]. 1275년(충렬왕 원년) 음력 1월 6일 원성공주(元成公主)에 봉해지고[10], 공주가 거처하는 곳을 경성궁 원성전(敬成宮 元成殿)이라 하였으며 공주를 위해 부(府)를 설치하여 그 이름을 응선(膺善)이라 하고 관속을 두었다[11].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면서 그 영향으로 1275년(충렬왕 1년) 고려의 관제는 모두 한 단계 격하된 형태로 개편되었다. 이때 중서문하성상서성이 합쳐져 첨의부가 되었고, 중추원밀직사로, 어사대는 감찰사로, 이부예부가 합쳐져 전리사가 되었다[12].

제국대장공주는 고려로 시집오면서 원나라에서 자신의 시종들을 그대로 데리고 왔는데, 이들은 고려에 들어온 후에도 계속해서 몽고 풍습을 유지하면서 고려에 몽고 풍습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밖에 연회를 즐기기를 좋아하였는데, 공주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연회를 즐기는 경우가 있었다[13]. 또 공주와 친분이 있으면 큰 죄를 지어도 금방 풀려나곤 하였다. 조인규[주 2]는 국가 재물을 횡령하고 죄없는 사람을 무고했음에도 단지 공주와 친분이 있어 귀양에서 금방 풀려나고, 훗날 감찰대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14].

그러나 공주는 잦은 사냥을 나가는 충렬왕에게 사냥을 중지하고 국사에 힘쓸 것을 간하는 등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으며[15], 성격도 매우 엄하고 밝아 자신의 측근들 중 잘못을 하는 자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16].

1275년(충렬왕 원년) 음력 9월 30일 사판궁(沙坂宮)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훗날의 충선왕이다[17]. 이 해 음력 12월, 공주가 아들을 낳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이 연회에서 충렬왕은 명령을 내려 공주와 정화궁주의 자리가 같은 위치에 놓이게 했는데, 공주는 이를 자신과 정화궁주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분노하여 결국 정화궁주의 자리를 옮기게 만들었다. 잠시 후 정화궁주가 무릎을 꿇고 공주에게 술잔을 올리자 충렬왕이 돌아보면서 눈짓을 하였는데, 공주는 이를 두고 "어째서 나를 흘겨보십니까? 정화궁주가 나에게 꿇어 앉아 그러는 것입니까?"라며 쏘아붙이기도 하였다. 결국 연회는 곧바로 끝나고 말았다[18].

1276년(충렬왕 2년) 음력 5월에는 충렬왕과 공주가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그런데 공주가 흥왕사에 있는 금탑을 궁내로 뺏어오고, 그 금탑의 장식은 공주를 따라 고려로 들어왔던 시종 홀라대(忽刺歹), 삼가(三哥)이 훔쳐가는 일이 있었다. 공주는 원래 이것을 해체하여 사적으로 쓰고자 했는데, 충렬왕이 이를 못하게 하자 공주는 울기만 하였다. 얼마 후 충렬왕과 공주가 다시 흥왕사에 흥차하였는데, 흥왕사의 들이 금탑을 돌려달라고 애걸하였지만 공주는 이를 거부하였다[19].

같은 해 음력 12월에는 어떤 이가 당시 고려에 다루가치[주 3] 로 와 있던 석말천구(石抹天衢)의 관사에 한 익명서를 투입하는 일이 있었다. 익명서를 투입한 자는 익명서를 투입한 후 곧 "옷이 있거든 입고 밥이 있거든 먹어 다른 이의 소득이 되게 하지 말라."고 외쳤다. 익명서가 투입된 다음날 석말천구가 이러한 사실을 충렬왕과 공주에게 고하였는데, 그 익명서에는 "정화궁주가 왕의 총애를 잃자 여자 무당을 시켜 공주를 저주하게 하고 있다. 또 제안공을 비롯한 43명이 불궤한 짓을 도모하여 다시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한다." 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분개한 공주는 정화궁주를 나장(螺匠)에 가두고 그녀의 부고[주 4]를 봉쇄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유경(柳璥)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공주가 감동하고 깨닫는 것이 있어서 정화궁주 등을 모두 석방시켰다[19].

1277년(충렬왕 3년) 음력 7월에는 충렬왕과 공주가 천효사(天孝寺)에 갔는데, 공주가 시종들이 적다며 도로 돌아오는 바람에 충렬왕도 돌아와야 했다. 이때 공주는 충렬왕을 지팡이로 구타하였고, 공주의 화가 조금 풀려 다시 천효사에 갔는데 이때는 충렬왕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며 또 충렬왕에게 욕을 하고 때리기도 하였다[20].

같은 해 음력 7월 29일에는 원종의 제2비인 경창궁주와 그 아들 순안공 왕종이 저주를 행한다는 무고가 올라왔다. 당시 저주의 내용은 경창궁주가 자신의 아들 순안공이 공주에게 장가들어 왕위에 오르려 하게 한다는 것이었다[21]. 이 보고를 받은 충렬왕은 대신들을 시켜 경창궁주를 국문하고 순안공에 대해서는 친국까지 하였으나, 대신들이 경창궁주 모자를 용서하기를 청하여 충렬왕은 이들의 재산을 적몰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도 대신들이 재산의 적몰 또한 상국인 원나라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 방침대로 하기로 하였으나, 공주가 이러한 절차를 생략하고 재산을 적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이들의 재산은 공주에게 몰수되었다[22]. 이후 원나라의 지시에 의해 1277년(충렬왕 3년) 음력 9월 16일 경창궁주가 폐위되어 서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였고, 순안공은 구음도(仇音島)[주 5] 라는 섬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23].

한편 1281년(충렬왕 7년) 음력 3월 20일 원 세조가 충렬왕을 부마국왕(駙馬國王)으로 정식 책봉하였다[24].

1282년(충렬왕 8년) 음력 8월에는 원 세조가 충렬왕에게 옛 송나라의관 연덕신(鍊德新)을 하사하였는데[25], 연덕신이 정력이 강해지는 약인 조양환(助陽丸)을 만들어 바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고려의 천문가오윤부(伍允孚)가 '이 약은 왕의 몸에 좋지 못하니, 삼한의 자손을 번성하지 못하게 할 사람은 바로 이 자다.'라고 하였고, 정말 충렬왕이 그 약을 먹은 후 결혼 초 해마다 태기를 보이던 공주는 다시는 임신을 하지 못하였다[26]. 한편 오윤부는 충렬왕이 태묘에 새로운 신위를 모시면서 이에 제사를 지낼 때, 공주가 함께 제사에 참여하겠다는 것을 "태묘는 조상의 신령이 있는 곳"이라고 주장하여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공주가 새 궁궐의 신축 공사를 벌이자 하늘에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음을 들어, 공주에게 궁궐 공사를 중단하고 덕을 닦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공주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다시 궁궐 신축을 벌이는데, 이때 공주는 오윤부에게 택일을 명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여 삭탈관직을 당하였다.[27].

1294년(충렬왕 20년) 음력 6월 29일 공주는 조카인 원 성종에 의해 안평공주(安平公主)에 봉해졌다[28]. 이때부터 충렬왕원나라쿠릴타이에도 서열 7위 자격으로 참여할 권한이 주어졌다.

1297년(충렬왕 23년) 공주는 수강궁 향각에 있으면서 시종에게 활짝 핀 작약을 하나 꺾어오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이 작약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고 흐느끼더니,[29] 얼마 후인 음력 5월 9일 병이 들었다.[30] 3일 후인 음력 5월 12일 충렬왕과 공주는 현성사(賢聖寺)에 행차하였는데,[31] 공주는 음력 5월 21일 현성사에서 3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3] 고릉(高陵)이며, 같은 해 9월에 장목인명왕후(莊穆仁明王后)의 시호[32], 이어 정민장선인명태후(貞敏莊宣仁明太后)의 시호를 받았으며[33], 1298년(충선왕 즉위년) 음력 8월 14일에는 충선왕에 의해 정식으로 인명태후(仁明太后)로 추존되었다[34]. 한편 1310년(충선왕 2년) 공주의 종손자인 원 무종황고 제국대장공주(皇姑 齊國大長公主)에 추봉하였고[35], 이 해 음력 9월 충렬왕과 함께 태묘에 부묘되었다[36].

공주가 사망하고 약 두 달이 지난 1297년(충렬왕 23년) 음력 7월 27일, 충선왕은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이 임금의 총애를 투기하는 자들의 소치라 하여 충렬왕의 후궁 무비를 살해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가둔 후[37] 예쁜 과부 하나(훗날의 숙창원비)를 충렬왕에게 바쳤다[38]. 이에 충격을 받은 충렬왕은 충선왕에게 양위하고 태상왕으로 물러나게 된다[39].

충렬왕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다. 그러나 장남 충선왕을 제외한 나머지 1남 1녀에 대해서는 낳았다는 기록만 있을 뿐[13][40], 그 생애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충렬왕 사후 충선왕부터 창왕까지 모두 공주의 후손으로 왕통이 이어진다[주 6]. 그리고 며느리인 계국대장공주는 제국대장공주의 조카인 원 현종(진왕[주 7])의 딸로 공주의 종손녀가 되는 등, 제국대장공주 이후로 등장하는 원나라 출신의 왕비들도 모두 그녀와 혈족 관계에 있다.

한편 정화궁주의 소생인 강양공 왕자는 원래 충렬왕의 장남이나, 원나라 공주의 소생이 아니라는 이유로[41] 왕위에 오르지도 못한 채 충청도 아주(牙州)[주 8]에 있는 동심사(東深寺)에 출가해야 했다[42]. 그러나 강양공의 차남인 왕고는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나중에 심양왕의 자리에 오를 뿐 아니라[43], 이를 기반으로 하여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의 왕위를 넘보거나 원나라에 충숙왕을 무고하여 곤란하게 하기도 하였다[44].

제국대장공주가 고려로 시집 온 것을 기점으로 하여, 고려의 왕들은 모두 원나라의 황족 출신의 여인을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45]. 또 고려의 왕위는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한 자에게만 돌아갔다[5]. 실제로 충혜왕이 원나라로 끌려간 후 그 왕위는 장성한 동생 공민왕이 아닌 어린 아들들(충목왕, 충정왕)에게 돌아갔다. 공민왕의 경우 어머니마저 고려인(명덕태후)이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일부러 원나라의 황족 노국대장공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1351년(공민왕 즉위년) 공민왕은 왕으로 등극하는데 성공한다[46].

일부 학자는 제국대장공주가 기존의 고려 출신 왕비와는 완전히 다른 대접을 받았으며, 상국의 공주라는 신분을 앞세워 국왕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다고 평가하였다[44]. 더불어 지나치게 불교를 믿는 바람에 불사에 국고를 낭비하였다는 평가가 있다[47].

한편 부산일보는 2005년 10월 6일의 기사에서, 제국대장공주 소생의 충선왕을 시작으로 원나라 출신 왕비들 소생의 고려의 왕들이 대부분 성격이 좋지 않고 일부는 요절까지 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어떠한 유전적 결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하였다[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