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범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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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범수용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치범, 혹은 일반 시민을 수용하는 정치범수용소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범수용소는 외부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 1990년대 이후부터 외부 세계에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2009년 현재 평안남도 개천시를 비롯한 6곳에 정치범 15만4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 이들은 심각한 인권 탄압과 가혹한 환경으로 국제사회로부터 비판받고 있다.[2]

정치범수용소 설립 초기에는 수용소 운영은 사회안전성 안전과가 담당하였고, 개천교화소와 청진에 있는 수성교화소를 정치범 교화소로 개조하여 이곳에 별도로 수용한 것이 정치범 수용소의 출발이라 보면 될 것이다. 초기에는 현재와 비교하면 경비가 삼엄하지 않았고, 허락을 맡으면 외출도 가능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탈출자가 속출하고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자 경비를 강화하여 오늘날의 정치범수용소가 되었다. 처음에는 수용소가 10곳 정도 되었으나 5곳으로 통합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특유의 폐쇄성으로 이들의 실체는 외부에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대부분의 모습이 탈출자 및 수감 전력자의 진술에 의해 추정되며, 현재에는 인공위성 등으로 존재가 확인되기도 한다.

북창관리소는 5만 명 가족이 함께 살지만 개천수용소는 주로 혼자 수감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적법한 절차 없이,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가 처참한 공개처형, 고문, 심각한 영양실조, 하루 12시간 이상의 강제노동이 자행되는 곳이 있어 그곳에서의 생활은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다.[2]

수감자들에게는 일일 배급량 350g 미만, 염장배추 3줄기, 소금 1.5g이 배급되며, 1990년대 중후반 식량난 시기에는 하루 200g만이 배급되였다.[2]

2009년 크리스마스에 김정일이 물러날 것과 정치범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며 북한을 방문했다가 43일간 수감된 바 있는 로버트 박은 "수용소에는 25만 명 정도의 사람이 수감되어 있고, 2002년 이후 최소 100만 명 가량이 수용소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또 어떤 탈북자는 수용소 내에 가스실이 있었다고 진술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탈북자는 의식주에 대한 보장이 완전히 끊긴 채 들판에 구덩이를 파고 생활을 하는데다, 먹을것을 구하기 위해 갯벌, 돌산을 헤매고 있으며, 굶어 죽어도 시신을 그냥 방치하여, 원시인하고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어,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다고 진술했다.[4]

1975년부터 2002년까지 18호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탈북자 김혜숙의 증언[2] 에 따르면 북창 관리소의 대부분은 탄광이고 거의 모든 수감자가 탄광에서 노역을 하고 있다. 28년간 북창 관리소에 수감 된 김 씨도 탄광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 기관지병을 얻었다. 또 철조망으로 사방이 막힌 북한 18호 관리소는 기강도 세고, 함부로 나갈 수도 없는 데다 탄광 사고로 숨지는 사례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5] 그녀는 빈번한 공개처형을 통해 수감자들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고 있는 수용소 내 통제 시스템을 고발했다.[6] '비둘기 고문', '펌프훈련 고문'(앉고서기 반복), '마구잡이 전신 고문' 등 수감자들이 인간이하의 삶을 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2] 철저히 통제돼 있어 죄인들은 탈출을 시도할 수조차 없으며 잡히면 공개처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한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