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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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洪命憙[1],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치가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48년 9월부터 196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각 부수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초대, 제3대 부위원장(1948년 9월 - 1957년, 1958년 10월 - 1968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 당시에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2],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본관은 풍산. 호는 벽초(碧初), 필명은 가인(假人) 또는 가인(可人)·백옥석(白玉石)이다. 일생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홍명희는 충청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괴산 홍범식 고가)에서 출생하였으며[3], 근처 제월리로 이주했으며 지난날 한때 충청도 괴산군 증평면 증평리에서도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제월리에는 그의 일가가 살던 생가가 존재하고 있다.[3]

그의 가계는 풍산 홍씨선조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남편 영안위 (永安尉)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의 차남 홍만형(洪萬衡, 1633~1670)이 그의 10대조이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홍인한 형제는 홍주원의 장남 홍만용(洪萬容, 1631~1692)의 증손이고, 방계 선조들 중에는 정조 때의 세도재상 홍국영도 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의 처가 역시 그의 집안의 방계 혈족들이었다.[4] 고모 홍정식은 독립운동가 조완구의 아내이기도 했다.[1]

홍명희의 증조부 홍우길은 장원급제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홍승목은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가 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금산군수 홍범식은 한일합방에 분개하여 자결한다. 어려서 생모를 잃고, 아버지 홍범식은 조씨와 재혼했으며, 계모 조씨에게서 이복 동생들이 태어났다.

생모 은진 송씨(恩津 宋氏, 1871~1890)는 군수 송은로(宋殷老)의 딸로,[1] 송시열과 함께 서인의 영수였던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9대손이다. 외숙 송종면(宋鍾冕, 1866~?)도 문과 급제자였다.[5]

1900년에 참판 민영만(閔泳晩, 1863~1916)[6]의 딸 여흥 민씨(驪興 閔氏, 1885~1953)와 결혼하였다.[1][7] 장인 민영만은 고종(高宗, 1852~1919)의 외조부 민치구(閔致久, 1795~1874)의 형 민치대(閔致大)의 손자이며, 민선호(閔璿鎬)의 아들이다.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 집안과도 그리 멀지 않다.[8]

1901년부터 1906년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중경의숙에서 학문을 공부하고 문학에 처음 접함. (부친은 법학을 하길 바랬으나 문학을 더 좋아함.)

그는 일찍부터 일본으로 유학, 일본의 다이세이 중학(大成中學)에서 수학하였다.[9]


1910년 8월 29일 그의 아버지 홍범식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던 홍명희는 아버지의 자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학업을 포기하고 조선에 돌아온다.[10] 그가 부친상 중인 1911년 4월에 일본 문예지에 게재한 일본어 단편 소설 "유서"가 근래 발굴되었다.[11] 일본이라면 치를 떨고 있어야 할 시기에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은 의외이며, 내용도 자살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부친의 자결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는 항일의식을 자결로 실천한 아버지가 남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그대로 받들어 실천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괴산에서 충청북도 최초로 참여하였다.[12]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이광수를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이광수와 친밀하게 지내며 그에게 톨스토이를 권했다고도 한다.[13] 홍명희는 조소앙, 이광수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였는데,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홍명희는 이광수를 버리지는 않았다.[14]

항일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15]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 근무, 아들 홍기문과 함께 참여한 신간회 결성등의 업적도 남겼다.

아들 홍기문의 증언에 의하면 맑스주의를 공부한다며 원서를 읽고,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 1879~1946)와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1880~1958) 등의 책을 사서 보기도 했다고 한다.[16] 또 1920년대 중반에는 조선 공산당 비밀 당원이었다가 출당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17] 이로 볼때 그가 적극적인 공산주의 활동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지만, 상당히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1927년 《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안재홍·김준연·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18] 1928년 11월 21일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소설 임꺽정은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불리었는데, 임꺽정 저자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연재가 4차례 중단됐으며,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는 '조광'에 발표됐다. 1940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못이겨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소설 '임꺽정'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칩거, 은둔생활을 지냈다.

1941년에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19], 1945년에는 언론보국회(言論報國會)[20]이광수(李光洙, 香山光郞), 최남선(崔南善) 등과 나란히 참여하여, 그도 친일 시비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다.

1945년 해방 뒤, 벽초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21]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임정개선환영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22]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23]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23]

1945년 12월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2월 29일 서울신문과의 기자회견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역설했다.[24] 김구와 임시정부 측이 신탁통치안에 반발하여,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면서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에 홍명희도 박헌영 등과 함께 참여하여 중앙위원과 상임위원(常任委員)이 되었다.[25][26] 또 같은 해 12월 30일에 40여 개의 좌익단체가 모여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를 열었는데 그가 위원장이 되어 신탁통치안 철폐요구 성명서를 채택했다.[27] 이 성명서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는데, ‘반동분자들이 갈망하는 신탁통치는 결코 실현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그 시점엔 좌익에게 있어서도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사람은 ‘반동분자’임이 분명했다.[28]

그러나 박헌영, 여운형 등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반탁운동에서 탈퇴하고 찬탁으로 돌아섰다.[29] 지조를 꺾고 스스로 반동분자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1947년 7월에 여운형이 암살된 이후[30] 홍명희가 근로인민당의 당수가 되어 활동하였으나 홍명희의 인기는 여운형에 댈 것이 못 되었다. 이후로도 민주통일당(民主統一黨),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 등 군소 정당의 대표를 맡았으나 정치적 역량 부족으로 세력 확대에는 실패했다.[31] 홍명희는 소설가, 문학가로 정평나 있지 정치적 입지로는 어울리지 못했다.

1947년 11월 총선 실시 및 감시를 위해 입국하는 UN위원단 환영대회에 명예회장 이승만, 회장 조소앙에 이어 부회장으로 참여하였다.[32] 1948년 1월 UN한국위원단이 도착하면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과 남북협상론이 나오자 그는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33]

그는 1945년 12월 김일성(金日成), 무정(武丁) 두 사람의 입경(入京) 환영준비 위원장을 맡은 바 있는데,[34] 그들의 입경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이때부터 홍명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보아 중도좌파에 해당하는 인물인 홍명희는 1946년 봄부터 북한공산당에 포섭되었다고 하며, 1946년 3월말과 8월에 두 차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 지도급 인사들을 만났고, 이들의 요청에 응하여 남한에서의 정치 활동을 했다는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의 비밀 방북에는 일찍부터 공산주의자가 된 둘째 아들 홍기무의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1947년 11월 중순 세 번째로 방북하였고, 돌아온 이후로 남한 단독 총선 반대와, 남북 협상 성사를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1948년 4월 김구의 방북은 성시백(成始伯, 1905~1950)의 공작도 있었지만 홍명희의 설득이 결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35]박갑동은 남로당의 홍남표(洪南杓, 1888~1950)[36]가 홍명희를 시켜 김구가 방북하도록 공작을 하게 했다고 한다.[37]

홍명희는 김구 등의 방북 직전인 1948년 2월에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왔다고 하는데,[38][39] 소련군의 군사위원이었던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 – 1992) 소장이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이 1994년 공개되면서 1948년의 남북정치협상은 소련군의 치밀한 정치공작에 따른 것이었다고 밝혀졌다.[40] 그는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방북하는 김구, 김규식 등과 같은 때 방북하였으나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눌러 앉았다.[41][42]

북한에 남은 홍명희는 몇달 뒤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 남한과 미국을 격렬히 비난하는 대남방송을 하였다.[4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하던 홍명희는 1948년 9월 9일, 북한 부수상(副首相)에 선임 되었다.[44]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45],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정치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들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1949년 1월 평양에서 열린 조소(朝蘇)공식회의(제1차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해 소련 사절단에게 공군을 확장해 줄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46]

김일성이 1949년 3월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러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 그도 부수상 자격으로 동행하였고, 당시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47][48][49] 스탈린은 당시에는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북한군이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허하였다. 그후로 김일성은 무려 48차례나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했고,[50] 번번이 거절하던 스탈린은 중국이 공산혁명에 성공하는 등 상황이 유리하게 변하자 마지 못해 1950년 1월 30일 남침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

이런 일들은 부수상이었던 홍명희도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고 이에 협력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6.25 남침 개시 이튿날인 6월 26일 조직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쟁 최고 지휘부였던 7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이었으므로[51][52] 그도 주요 6.25 전범 중의 한 명이다.

1950년 7월 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남한 토지개혁의 실시를 발표했다. 이미 그 이전인 1949년 5월 13일 <공화국 남반부의 토지개혁실시를 위한 법령기초위원회>가 조직되어 남한 토지개혁 준비 사업에 착수하고 있었는데, 홍명희가 그 위원장을 맡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의 토지개혁 법령안을 만들었다.[53] 이런 것들은 그가 일찍부터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적극 협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9년 9월 김정숙이 죽자 김일성(金日成)은 1950년 1월 15일에 홍명희의 딸 홍영숙(洪永淑)과 재혼한다.[54] 6.25 남침 당시 그는 김일성의 장인이었다. 6.25 때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부 조옥희(趙玉姬)가 홍영숙은 심장이 약하다고 증언했으므로 아마 그 문제 때문인 것 같지만 그녀가 결혼 초기에 죽어 이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김일성은 홍명희를 여러모로 배려하고 지원하여 두 사람은 상당한 유착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5] 박갑동(朴甲東, 1919~ )에 의하면 홍명희는 부수상에 선임되자 이에 감격하여 쌍둥이 딸 둘을 김일성 관저에 가정부로 들여보냈다 한다.[56] 이들 중 한명이 1950년 1월 15일 김일성과 결혼한 것이다.

대부분의 월북 문인들이 숙청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홍명희만 고위직에서 승승장구한 것은 이러한 김일성과의 유착관계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여러 문인들의 숙청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적극적으로 변호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6.25 전쟁 중인 1952년 "근로자"지에 《김일성 장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며 조직자이다》라는 글을 써서 전범 김일성을 찬양한 바도 있다.[58]

한국 전쟁 때 피난오던 도중 이광수가 심한 동상과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그는 직접 이광수를 찾아 왔다. 그는 김일성의 재가를 얻어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기 숙소에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광수폐결핵의 악화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45]

1961년 5월 13일 부수상 홍명희가 위원장이 되어 북한의 각 정당사회단체를 대표하는 33명의 준비위원들이 모여 노동당 외곽단체의 하나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를 조직하였고, 이를 통해 대남 정치공세를 펼쳤다.[59] 올림픽 위원장(委員長),[60] 과학원장(科學院長)으로있다가 1962년에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부위원장(最高人民會議常任委員會副委員長)에 선임 됐었다.[61]

북한에 아무 기반도 없었고, 공산주의 활동을 맹렬히 한 전력도 없던 홍명희가 1948년 4월 월북 직후 부수상이라는 최고위직에 발탁된 것은 상당히 의외의 인사로 보인다. 하지만 이면에는 그가 해방 직후부터 비밀리에 북한을 왕래하며, 북한에 포섭되어[35] 남한에서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활동을 주로 했고, 김구와 김규식의 방북을 성사시키고, 동행한 400여명의 인사중 70여명이 북한에 눌러앉게 하여[62] 아직 정부 출범도 못한 남한의 우파 진영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남북협상 찬반으로 남한내 갈등을 조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로 보인다. 당시 남으로 귀환하지 않은 70여명은 방북후 갑자기 북한 잔류를 결정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처음부터 북한을 위해 활동하던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63]

그 자신이 월북 직후인 1948년 8월말에 대남 비방 방송을 한 바도 있지만,[43] 1949년 6월 25일 - 28 일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 결성대회에서 중앙 위원회 위원 과 중앙 상무 위원회 위원으로 선임 되었다. 이 단체는 남한내의 정치적 혼란과 갈등을 부추기는 활동을 주목적으로 하는데, 당시 일어난 김구의 피살에 대해 홍명희는“김구씨는 일생을 두고 조국 독립을 위하여 분투한 분입니다. 비록 그가 민주주의적 자주독립 방향에 대하여는 반민주주의적, 철저하지 못한 견해가 있었으나 … 미군주둔을 반대하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인사였습니다. 이러한 분이 이승만 도당의 손에 조난당한 것은 비분할 뿐입니다. …”는 성명을 발표했다.[64] 그러나 김구가 피살되는 단서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홍명희 자신이다. 북한의 지령에 따라 김구, 김규식의 방북을 적극 설득하여 남한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야기 시켰다. 김구는 방북 이후 끝까지 남한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반대하며 결과적으로 김일성에 유리한 행동으로 일관하여 그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 암살의 주된 원인이다. 홍명희가 진심으로 그렇게 독립지사의 죽음에 분노했다면 왜 김일성 일당이 조만식과 민족진영 인사들을 구금했다 처형한 것에 대해서나, 이후의 수많은 항일 투사들의 숙청, 처형에는 입닫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6.25때 서울에 온 북한 공작원들의 납북 대상자 목록에는 1948년 4월 남북 정치협상에 참여한 정당·단체 지도자와 개별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고,[65] 홍명희의 설득으로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김규식은 실제로 납북 당했다. 김구도 암살 당하지 않았더라면 6.25 때 납북 대상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홍명희의 아들과 비서가 남파되어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대남 공작에도 적극 간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차남 홍기무(洪起武)는 1949년 9월 초순에 남파되어 홍명희가 월북전 당수로 있었던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의 조직을 강화하고, 한국 정부 파괴 및 요인 암살 등을 기도하다 12월 말에 체포되었다.[66] 그는 6.25 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감옥을 탈출하여 장인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09.07)를 납북하였고,[67][68] 위당의 죽음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25 당시 홍명희 그는 김일성의 장인이었으며, 홍명희의 장남 홍기문 그는 김일성의 첫째 처남이었다.

홍기무는 6.25 당시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당 연락부장 이주상(李胄相, 1915~?)의 지시로 내무성 정보국장 방학세(方學世, 1912~1992)의 요인 납북 공작에 협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5]

위당의 셋째 아들이자 홍기무의 처남 정흥모(鄭興謨)는 6.25 때 국군으로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두 집안은 친구고 사돈이라는 좋았던 인연이 마지막에 악연으로 돌변한 경우이다.

홍명희의 차석 비서 김원철(金元哲)도 6.25 때 남파되어 선전 사업 중에 서울 탈환으로 9월 20일 월북하였다. 지령을 받고 1950년 11월 5일 다시 남파되었다가 청량리 친척집에서 11월 14일에 체포되었다.[69]

6.25 와중에 그의 고모부 조완구(趙琬九, 1881 ~ 1950)나 위당 정인보를 납북한 일에도 그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시 북한 요원들은 납북 대상자 명단을 사전에 준비해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들이 포함된 것은 부수상인 홍명희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내락 없이 하급자들이 부수상 친인척의 신병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6.25 전후로는 전쟁 준비와 수행에 적극 협력하여 전쟁에 대한 책임이 상당하다. 휴전 이후로는 1961년 5월 13일 부수상이었던 그가 위원장이 되어 노동당 외곽단체의 하나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祖國平和統一委員會, 조평통)를 조직했는데, 이 단체는 대남 정치 공작과 선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남한 내 여론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유발하는 일들을 해 왔다.[70]

1968년 3월 5일 사망하였다.[61]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의해서 보전되어 있다.

홍명희의 출신 가계는 대대로 권력을 추구해온 집안으로, 조선이 망하고, 부친의 자결로 일제시대에 잠시 권력에서 멀어졌다. 해방이 되자 마자 홍명희가 여기(餘技)에 지나지 않았던 문학을 버리고 권력 획득을 위해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은 집안 전통에 비추어 보면 자연스럽다. 그가 북으로 간 것은 치열한 공산주의자라서기 보다는 왕조의 관료가 되어 권력을 장기간 향유해온 집안 전통에 익숙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해방후 남한에 막 도입되고 있던 자유민주 체제하에서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는데는 실패하고, 이미 왕권 이상가는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에게 귀부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길을 택한 이유도 그것이 자신의 집안에 익숙한 방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식의 민주정치 체제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고, 북으로 가서 공산 독재자가 동양적 왕권에 가까운 권력을 가진 체제에 적응하는 것이 더 용이했던 것이다.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서 얻은 명성이 왕조시대 문과급제 이상가는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명분없는 월북의 변으로 남한이 친일파 청산을 하지 않는다며 아직 정부도 세워지지 않아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은 남한만 비판하고, 소련이 데려온 꼭두각시 김일성이 해방 직후부터 사실상 최고 권력자 행세하며 정치적으로 방해가 되는 많은 사람들을 자의적으로 처단한 것을 친일파 청산이라 찬양한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71]

월북한 홍명희는 부수상이 되어 김구의 피살에 대해 이승만과 미국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도[64] 김일성이 조만식 선생과 민족진영 독립운동 인사들을 구금했다 처형한 것에 대해 단 한번도 문제 제기를 한 적도 없다. 무정(武亭), 김두봉 등 연안파, 박헌영 등 남로당파 인사들을 무단 숙청, 처형할 때도 이를 비판하고 항거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월북한 유명 문화 예술인들 대부분이 숙청 당할 때도 그들을 변호한 적도 김일성에 항의한 적도 없다.[72]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남한의 저명한 독립운동가 김규식, 정인보, 안재홍, 조완구 등 수십명을 납북해서 불행한 운명을 맞게 한 6.25 남침에는 자신도 오히려 적극 협력하였다.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대남 공작에 불과한 남북협상을 위해 김구의 방북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남한내의 갈등을 조장한 홍명희 본인이 그의 피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39] 일제의 불의에 항거한 걸 자랑으로 삼는 사람이 김일성의 불의에는 눈감고 같은 편이 되어 그가 쥐어주는 권력을 아들, 손자까지 대대로 누리기나 했다.

홍명희나 그 아들, 손자들은 김일성이 베풀어주는 관심과 시혜에 감격하여 그를 찬양해 마지 않는 봉건왕조의 신하와 같은 정신상태를 가진 사람들이다. 찬양시와 글까지 지어바지면서,[73][58] 김일성 권력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의문을 표한 적도 없고, 그 자 때문에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당한 불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무력과 정치공작을 동원하여 국민들의 일방적 지지를 받던 조만식(曺晩植, 1883~1950)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5년간 교육시킨 김일성을 내세워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 사정을 모를리 없으면서도 아무 정당성도 없는 체제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하수인 노릇하며 영화를 누린 것은 일제에 협력한 것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다.

그는 근대적 국가의 가장 핵심 요소인 주권 재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에 김일성이 소련군 무력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한 것에 대해서도 전혀 문제를 못 느끼고 그의 신하가 되는 길을 택했다. 봉건왕조 시대의 사고를 가졌기에 김일성의 장기 독재에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아무 거부감 없이 순응하며 봉사하여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그를 중용한 김일성은 문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을 이용하고 싶었을 것이다.북한 지역에 아무 연고가 없어 독자 세력을 구축할 위험이 전혀 없다는 것도 장점이었을 것이다.

그의 딸이 김일성과 결혼한 것은 문중의 선대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이 여동생을 궁으로 들여보내 정조(正祖)원빈(元嬪, 1766~1779)이 되게한 것과 판박이다.[74] 홍국영은 홍명희의 고조부 홍정주(洪定周, 1787~1867)[75]의 생가 쪽 당숙 (5촌 아저씨)이다.[76] 홍명희의 딸이 결혼 초기에 일찍 죽은 것도 홍국영의 경우와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홍국영은 여동생이 죽자 곧 권좌에서 밀려나 일찍 죽었지만, 홍명희는 장수하며 죽을 때까지 권력을 누리다가 아들, 손자에게까지 물려줬으니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김일성은 조선 선조의 외후손이자, 조선말의 대표적 외척인 풍산홍씨와 여흥민씨의 피를 물려받은 홍명희의 딸과 결혼하여 조선왕실과의 혈연상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었을 수도 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의 허가를 얻기 위해 무려 48 차례나 전문으로 요청을 했지만 번번히 거절 당했다고 한다.[50] 부수상인 홍명희가 아무리 허수아비라도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는 부수상과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수백만의 사상자를 낸 6.25 남침에 동조하고 전쟁 준비 및 수행에 협력하여 주요 전범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소련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던 김일성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일조하여 오늘날 북한이 최악의 인권 상황의 세습 전제 왕조로 전락한데에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인생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것도 아닌 홍길동전이나 수호전(水滸傳) 따위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 진부한 의적을 미화한 소설 《임꺽정》 한 편으로 얻은 과도한 명성 때문에 해방 후 그가 저지른 수많은 과오는 묻혀지고, 터무니없이 과대 평가된 대표적 인물이다. 자신을 유아 때부터 길러준 노모를 버리고, 자식 손자까지 일족 모두 월북하여 본인은 물론이고, 아들 손자대까지 김일성 일족이 쥐어주는 고위직에 나아가 그들에 충성하며 대대로 영화를 누린 것은 개인적으로는 성공이겠지만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은 못된다.

박갑동에 의하면 평양에서 홍명희를 만난 사람들의 얘기로는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가득차 서울을 그리워하고 있더라고 하였다.[56]

해방 후 정치를 하지 말고 문학인으로 남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홍명희는 월북하면서 이승만과 남한이 친일파 청산을 하지 않는다고 비방하고, 김일성은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했다고 주장했다 한다. 북한의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을 지내며 부수상이었던 홍명희와 자주 만나기도 했던 소련의 고려인 출신 정상진(鄭尙鎭, 1918~2013)도 홍명희로부터 유사한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71] 김일성은 해방직후부터 소련군을 등에 업고 집권자 행세를 하고 있었는데 비해 남한은 정부도 없고 이승만은 집권하기도 전이므로 사리에 맞지도 않는 엉뚱한 주장을 한 것이다. 명분없는 월북을 남쪽 인사들에 대한 비방으로 가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은 오늘날에도 최고 권력자의 말 한 마디로 고위 관료에 대한 공개 총살이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나라로 혼란기였던 해방 당시에 정상적인 입법과 법집행으로 친일청산이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다. 김일성은 소련군 무력을 등에 업고 공식적인 정부 수립이전 1945년 해방 직후부터 최고 권력자 행세를 하며 정치적 필요에 의해 여러 세력들을 자의적으로 처단하면서 친일 청산이란 명분을 가져다 붙였을 뿐이다. 반면에 남한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야 친일청산 문제를 다룰 수 있었지만, 행위 자체가 국가가 생기기도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소급입법으로 처벌한다는 것이 법적으로도 논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반민특위 법안이 국회에 통과되자 법무장관이 대통령에게 위헌을 문제삼아 거부권 행사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여 미흡하나마 정상적인 입법과 수사 및 재판을 거쳐 다소간의 청산이 이루어 졌다.

북한이 자랑하는 철저한 친일청산의 내막은 전혀 다르다.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해방이후 전 국민의 숙원인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 내는가 하는 문제는 정치가로서의 승패가 달린 관건적 안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떠오르던 많은 정치인사들 중 누구보다 정치 감각이 탁월했던 김일성은 이를 자기 권력기반 형성에 완벽하게 이용하였다. 그 대표적 방법이 인구 70 %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사회에서 일제시기 땅마지기나 가지고 있던 자들을 우선 처벌하는 일이었다. 3천 평 이상 소유한 자는 지주, 천오백 평부터는 부농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땅을 무상 몰수하는 것과 동시에 본인들은 전부 타고장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의 개인적 사정을 알 바 없는 낯선 고장 사람들은 국가가 ‘친일주구’ ‘역적’이란 딱지를 붙여놓은 추방자들을 심판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 심판대에 오른 사람들은 피비린내를 맡기 전에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군중 히스테리의 제물로 고스란히 바쳐졌다. 군중의 열기가 고조되면 될수록 김일성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급상승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인들을 ‘적대계급’ 증오사상으로 자극시킬 때 그것이 가져올 반사작용의 효과를 알았다. 농민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분배해 준 자신에 대한 숭배열이었다. 김일성이 무상 분배한 땅은 ‘국가’의 이름하에 곧 압수될 정치 미끼일 뿐이었다. 농민들은 얼마안가 나라에 땅을 몰수당하고 ‘사회주의’의 미명하에 지주의 머슴에서 수령의 노예로 신분이동을 하였다.”

홍명희는 김일성이 전주민의 재산과 자유를 대부분 박탈하고 수령의 노예로 만드는 일에 협력하면서 수령이 댓가로 베풀어주는 시혜에 감격해한 사람이다. 일제 통치에 의한 피해의 책임은 대부분 일본인들에 있고, 소위 친일파에 의한 피해는 그에 비하면 미미하다. 반면에 김일성 일족 정권은 남북한 전체 주민들에게 일제보다 더 큰 피해를 입혔으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김일성 일족과 그에 충성한 홍명희 같은 사람들에게 있다. 이들의 죄질이 친일파보다 몇백배 더 나쁘다.

북한 전문가인 브라이언 마이어스 부산 동서대 교수는 독일의 튀빙겐 대학에서 북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김일성 치하의 문화에 대한 개척적인 연구라 할 만한 『한설야와 북한문학(Han Sorya and North Korean Literature)』을 출간한 바 있는데, 북한의 친일 청산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북한은 친일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본인 기술자들을 산업 시설 가동을 위해 귀국도 못하게 막고 고임금을 주면서 고용하였다. 오원철은 북한 당국이 일본인 기술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과 재산을 보장한다는 신분증을 발부하고, 생필품과 주택을 포함해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로 인해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868명이나 되었고 1947년에는 405명이 되었다. … 일본인 기술자에게는 월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북한 정권에도 상당수 친일파가 참여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82]

남한에는 반민특위의 법절차에 따른 친일파에 대한 수사와 재판 기록이 남아 있지만[83], 북한에는 이와 관련한 아무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정당한 사법적 절차가 아닌 적대계층에 대한 친일파 몰이 인민재판만 있었기 때문이다.

1998년 10월 17일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서 홍명희 선생의 문학가로서의 업적을 기리는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홍명희의 월북사실을 문제삼은 괴산 재향군인회 등의 우파단체들의 반발때문에 1948년 월북했다는 문구가 삽입된 새로운 비문이 2000년 6월 12일 건립되었다.

1928년 조선일보에 소설《임꺽정》을 연재하였는데, 집안에 있던 열 두명의 머슴들 이야기를 듣고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이라는 문학가들의 긍정적인 평가와 임꺽정은 도적에 불과한데, 사회주의자인 홍명희가 의적으로 미화시켰다는 역사학자들의 부정적인 평가 등 모두 존재할 정도로 의미가 큰 작품이다.[84] 손자 홍석중의 말에 따르면, 홍명희는 '왜놈들이 조선말과 조선 정조를 탄압하니까 그것을 살려서 널리 알리려고 임꺽정을 쓴 거였지 소설을 쓰려던 건 아니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해방 뒤, 미완으로 끝난 임꺽정을 마저 완성시키시라는 주문에 대해서도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미완으로 놔두는 게 좋다'며 끝내 완성시키기를 거부하였다.[85]

그러나 북한의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을 지내며 부수상이었던 홍명희와 자주 만나기도 했던 소련의 고려인 출신 정상진(鄭尙鎭, 1918~2013)은 "홍선생(홍명희)은 소설 '임꺽정'을 완성하려 무척 애를 썼다"고 말했다.[71] 아무 권력이 없었던 일제시대에나 하던 일을 임꺽정이 저항했던 백성들을 수탈하는 최고 권력층이 된 다음에도 계속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임꺽정 소설 때문에 얻은 명성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몰수해 전국토와 국가를 사유화한 사상 최악의 수탈 군주의 장인이 되어 자손 대대로 영화를 누렸으니 지하의 임꺽정이 분노할 것이다.

북한에서는 인민들 사이에 저항 의식이 생겨날 것을 우려하여 예술영화 ‘임꺽정’의 주제가인 ‘나서라 의형제여’와 ‘사무친 원한을 풀리라’의 테이프와 음반을 강제수거하고 있다고 한다.[86]

어느 탈북자는 "김일성이 무상 분배한 땅은 ‘국가’의 이름하에 곧 압수될 정치 미끼일 뿐이었다. 농민들은 얼마안가 나라에 땅을 몰수당하고 ‘사회주의’의 미명하에 지주의 머슴에서 수령의 노예로 신분이동을 하였다.”고 증언했다.[77]

1950년 1월 15일 그의 딸 홍영숙(洪永淑, 또는 홍애연(洪愛姸)[95])이 김일성과 결혼하였는데, 맏딸 또는 둘째딸[96]이라는 것으로 보아 쌍둥이인 홍주경과 홍무경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정된다.

홍명희의 조부 홍승목(洪承穆, 1843~1925)이 1867년에 작성한 직계 선조 계보 "풍산홍씨직파연보도(豐山洪氏直派年譜圖)"가 있다.[97] 부친이 생부 홍우필(洪祐弼)로 나오므로 당시는 아직 홍우길의 양자가 되기 전이다.

홍명희가 가족들을 데리고 월북할 당시 고향이자, 선친의 묘소가 있던 충청북도 괴산군에 있던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은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통을 겪었고, 그의 제수와 계모는 한국 전쟁 중 총살형을 당하였다.[3] 실제로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홍명희가 북한에서 고위 관리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우익 인사들에 끌려가 살해당했다고 한다.[87] 이는 그가 단순한 월북자가 아니라 6.25 당시 그가 김일성의 장인이었다는 것과,[54] 부수상으로 전쟁 최고 지휘부였던 7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이었으므로 전쟁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 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노모만 남겨두고 월북한 홍명희 형제와 그 아들들의 책임이 더 큰 사안이다. 북에서 자신들이 고위직에 나갈수록 남한의 노모가 더 위태로워질 것은 상식인데 아들 홍기무나 비서관을 간첩으로 남파하면서도 노모를 방치한 것은 그들 책임이다. 6.25 전란 중에 좌우익이 서로 죽고 죽이고 하던 일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국 도처에서 수시로 벌어졌던 일이고, 굳이 책임 소재를 따진다면 전쟁을 일으킨 자들의 책임이다. 수백만이 죽어나가는 전쟁 상황에서 전범 홍명희가 유명인사라고 그의 가족의 생명만은 안전해야 한다는 것은 6.25 남침 때문에 이유없이 죽어간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모독이다.

장남 홍기문은 역사학자, 한글학자로 활동했으며, 그와는 나이 차이가 15세였다. 부자 간의 격식을 따지지 않고 서로 맞담배를 피우기도 하였다.

홍명희의 딸이 김일성과 결혼했지만,[54] 일찍 죽어 남한에는 이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아 이와 관련한 여러 가지 소문들이 돌았고, 학계에서도 사실 확인을 제대로 하지 못해 어이없는 잘못된 주장들을 하고 있다.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 왼쪽부터 백남운, 허헌, 박헌영,홍명희.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홍명희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1949년 3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을 수행하여 소련 최고회의 앞 계단을 오르는 장면. 앞줄 왼편부터 박헌영, 최용건, 홍명희, 김일성.[47] 당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거절 당했다. 동행한 홍명희도 당연히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이듬해 초 남침을 승인했고, 홍명희는 남침 준비와 전쟁 수행에 협조하였으므로 그도 6.25 주요 전범의 한 사람이다.
1958년 5월 5·1절 경축행사가 끝난 뒤 평양 교외 호수에서 김일성(오른쪽)과 홍명희가 뱃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55] 이 사진은 김정일이 16세때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57]
1950년 1월 김일성(金日成)이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재혼(再婚)했다는 한성일보(漢城日報) 1950.01.25 일자 2면 기사.